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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인

대하소설 '지리산' 등으로 우리나라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작가 이병주(李炳注, 1921~1992)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70년대 중반 파리에서였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팬클럽회의에 참석했다가 선우휘(鮮于煇) 선생과 함께 프랑스에 들렀을 때 두 분과 노르망디 지방을 여행했던 것은 젊은 시절 필자가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추억이다. ▶노르망디에서 파리로 돌아온 이병주 선생은 대뜸 마르세유를 가보고 싶다고 했다. 파리에서 근 800㎞나 떨어진 곳으로 왕복 자동차 여행도 버거운 곳이었지만 근무지를 계속 이탈하기도 곤란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던 선우휘 선배의 권유와 허락으로 마르세유를 찾기로 했다. ▶아침 일찍 파리를 떠나 10여시간이 걸려 마르세유 도심에 있는 항구에 도착한 이병주 선생의 첫 반응은 "어째 옛날과 이리 똑같노!"였다. 학창시절 프랑스 유학을 꿈꾸고 수에즈운하를 통과해서 마르세유 항에 도착했던 35년 전과 변함이 없다는 놀라움이었다. 그날 저녁 늦게까지 항구가 바라보이는 부둣가의 브라서리에서 포도주 잔을 비우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의 첫 작품 '소설 알렉산드리아'도 당시의 기억으로 쓰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파리와 리용과 함께 프랑스의 3대 도시로 꼽히는 마르세유는 기원전 그리스의 식민도시였다가 로마제국의 직할 식민지를 거쳐 1481년 프랑스에 통합된 지중해 최대의 항구로 꼽힌다. 수에즈운하가 개통되어 무역항으로 번영하면서 공업도시로서의 기능도 갖추게 되었다. 현대식 콘크리트 아파트의 시조로 꼽히는 건축가 르 꼴뷔지에의 '위니테 다비타시용'이 마르세유에 자리를 잡게 된 것도 2차 대전 후 팽창하는 인구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난 달 파리에 체재하고 있을 때 피카소 특별전을 보기 위해 마르세유를 찾았다. 고속열차(TGV)로 3시간대에 갈 수 있는 마르세유를 그동안 여러 차례 찾았었지만 겨울철 지중해의 찬바람을 맞으며 항구에 선 것은 처음이었다. 외양상으로는 40여년 전 이병주 선생과 왔을 때와도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도시의 내면과 항구는 아직도 화물들과 중고자동차로 붐비는 인천 내항과는 달리 시민 친화적으로 변해 있었다. 내항에는 여객선과 요트로 가득 찼고 노만 포스터의 유리천정 조형물이 시민들을 즐겁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