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잠든 외국인 이야기] 4. 제물포의 무역상, 미국인 타운센드(끝)
▲ 미국인 거상 월터 데이비스 타운센드의 묘.
▲ 경인철도 1차 기공식.
▲ 독일인 마이어가 제물포에 설립한 세창양행의 사택.
▲ 독일인 마이어가 세운 세창양행의 직원 헤르만 헨켈의 묘.
▲ 인천 외국인 묘지 16번에 잠든 '하나 글로버 베넷.'
▲ 오페라 나비부인의 실제 모델이라 알려져있는 아와지야 쯔루의 딸 하나 글로버 베넷의 표지석.
구한말 열강 상권 침탈·자본 약탈

타운센드 상사 1930년까지 운영
사치품·정미업 … 석유 독점판매도

獨 마이어 세운 '세창양행' 큰 이익


개항장 외국상인

개항장은 외국상인들이 상업자본을 무기로 이권을 챙기려는 침략의 무대였다. 서구제국주의가 중국, 일본, 조선의 문호를 강제로 열어 무역의 이익과 특권적 거주, 조차지의 획득을 목적으로 개항장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인천 제물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과 청국, 구미 등 외국의 거대상사들이 개항 이후 인천에 진출해 속속 자리를 잡았다. 일본과 청국, 구미열강의 상업자본이 인천을 거점으로 치열한 이권다툼을 벌이며 조선을 침탈한 것이다. 규모가 큰 광산과 철도, 전선, 산림분야 만큼은 아닐지라도 무역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본투자 없이 고리대적인 이자이윤을 추구한다던가, 중개무역업을 하는 식으로 조선의 상권을 침탈하고 약탈적 자본을 축적해 갔다.

인천항에 진출한 서양 무역회사로는 미국의 타운센드상사, 독일의 세창양행, 영국의 이화양행 등이 대표적이다. 인천항의 상권을 놓고 일본과 청국의 다툼에 서양상사가 가세한 것이다.

인천 중구 각국조계가 시작되는 곳에 인천에서 가장 큰 사업을 벌인 세창양행이라는 독일 마이어상사의 인천지점이 있었다. 지금은 '중앙프라자'라는 6층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응봉산 정상의 세창양행 직원사택 건물은 광복 후 한 때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사용됐다. 또 개항 직후 외국의 거상이었던 세창양행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던 미국상사, 타운센드상사가 각국조계에 자리했다. 인천중동우체국 맞은편 공영주차장 자리에는 광창상회가 있었다.

중구청 뒷거리 첫 모퉁이에 흰색 2층 서양식 건물의 영국회사 홈링거양행이 자리를 잡았다. 서양상인들은 비록 소수이지만 주로 인천지역에서 활동하며 무역업에 종사했다. 특히 조선정부에 고용된 자국 관리나 외교기관의 비호를 받아 조선정부와 교섭해 특권과 이권을 챙겼다. 이처럼 서양인들이 운영한 회사들은 개항장 곳곳에 흔적을 남겼으며, 몇몇 무역상인들은 죽어서도 인천 외국인 묘지에 묻혀있다.


미국인 월터 데이비스 타운센드

미국인 월터 데이비스 타운센드(Walter Davis Townsend, 1856~1918)는 인천에 진출한
모오스&타운센드상사(Morse and Townsend & Company)의 책임 경영자였다. 그는 19세기 말 23세에 일본으로 넘어가 모오스의 미국무역상사에 고용된 지 불과 1년만에 고베지점 설립 및 운영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낸 타고난 상인이었다. 그리고 1884년 4월 일본인 아내·아들과 함께 내한해 제물포에서 미국무역상사 지점을 열었다. 이후 34년 동안 제물포에 거주하며 경인선 철도건설에 관여하고 타운센트상사(Townsend & Company)를 운영했다. 그는 인천가족공원 외국인 묘지(42번)에 잠들어 있다.

타운센드가 1884년부터 1895년까지 모오스의 미국무역상사를 인천대리점 형태로 운영했기에 모오스&타운센드상사였는데, 1895년 타운센드가 모오스의 권리를 매수해 타운센드상사로 개칭, 1930년까지 운영됐다.

1885년 초 타운센드는 인천의 순신창상회를 인수해 서상집(徐相集)을 대리인 사장으로 삼아 내륙의 미곡무역에 종사했다. 그리고 한국인 객주와 상인들에게 자본금을 대여하기도 했다. 또한 타운센드상사는 1888년 이후 무기를 구입해 조선정부에 납품하면서 면세혜택까지 받았다. 왕실관련 사치품 납품, 전기관련 용품 등을 납품하고, 왕궁전등시설 공사에 참여했다. 우피와 식료품, 식기류, 의약품, 의류, 침구류, 무기 및 탄약류, 문방구류, 실내장식용품 등 인천 등지의 외국인을 대상으로 판매도 했다.

타운센드상사는 1892년부터 정미업도 운영했다. 증기력을 응용한 완전한 정미공장의 효시인 타운센드 정미소를 설립, 운영했다. 이 기계는 종전과 같이 미곡을 찧는 것이 아니고, 곱게 가는 까닭에 쌀이 깨끗하고 광택이 있으며, 돌의 흡입이 전혀 없어서 이 쌀은 일본·러시아로 특등 수출품으로 실려 나갔다.

타운센드는 1895년 말부터 독립경영을 시작했다. 그는 1897년 3월 미국의 거대 석유기업 스탠다드 석유회사와 계약을 맺어 조선에서의 석유 독점판매권을 획득했다. 그는 1896년 인천 월미도에 약 50만통의 석유를 저장할 수 있는 창고를 지었으며, 1900년 부평 서면 율도에 폭약창고를 건설해 세창양행과 함께 폭약을 공급하기도 했다.

한편 타운센드는 1897년 3월 구한말 정부로부터 경인철도부설권을 획득한 바 있는 미국인 모르스(James R Morse)와 동업해 한국 최초의 철도회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모르스가 자금조달에 실패하면서 철도부설공사는 결국 일본인 손에 넘어갔다. 서울과 인천을 잇는 한국 최초의 철도, 경인철도는 1897년 3월 29일 기공돼 1899년 9월 18일 개통됐다. 경인철도의 완공으로 육로로 12시간 걸리던 서울과 인천간의 거리가 1시간 안팎으로 줄어들었다. 이전까지 서울과 인천간의 교통·운수는 경인도로와 인천·용산 간 항로를 이용하는 등 두가지 길이 있었다.


독일인 헤르만 헨켈
독일인 마이어(H.E. Meyer)는 함부르크에 둔 본사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무역사업에 적극 참여해, 1884년 제물포에 세창양행으로 알려진 마이어 상사(E. Meyer & Co)를 설립했다. 세창양행은 선박운송, 차관, 기술자 고빙, 광산개발, 무역 등의 사업을 벌여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 무역품으로는 초기에는 바늘, 염료, 면포 등 생활용품을 판매하다가 점차 쇠, 강철, 약품, 기계, 무기 등을 중개무역해 큰 수익을 얻었다.

특히 '세창바늘'이라는 독일제 바늘은 여인네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1886년 조선정부는 세창양행으로부터 2만 파운드의 차관을 제공받았고 세곡운반을 위해 이 회사 소속 선박을 고용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세창양행은 무역을 중심으로 하면서 독일인 관료와 영사관의 비호하에 한국내의 독일이권에 깊숙이 개입하고 그 과정에서 큰 이익을 남겼다. 한국정부를 대상으로 사업을 벌여, 독일의 한국경제 침탈의 선봉에서 그 중개 역할을 담당했다. 세창양행의 직원으로 활동했던 헤르만 헨켈(Hermann Henkel, 1877~1935)이 외국인 묘지(48번)에 잠들어 있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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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글로버 베넷 母 아와지야 쯔루, 오페라 '나비부인' 실제 모델?

일본 관광상품 만들어 스토리텔링 … 근거 희박

무대 배경만 일치 … 삶은 너무 달라

15살 일본여인 게이사는 미군 장교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지만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아이까지 빼앗기자 끝내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푸치니가 일본 나가사키를 무대 배경으로 만든 오페라 <나비부인>의 여주인공 초초상(나비부인)의 슬픈 사랑이야기다.

인천 외국인 묘지(16번)에 하나 글로버 베넷(Hana Glover Bennett, 1873~1938)이라는 일본 여인이 묻혀있다. 베넷은 1897년 홈링거상사(Holme & Ringer Company)의 영국 청년 월터 베넷(Walter G. Bennett, 1869~1944)과 결혼하고 한국으로 건너와 제물포에서 4남매를 낳고 40년 동안 살다가 사망했다. 그녀의 묘역에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소재와 무대가 되었던 나가사키의 무역상 글로버 집안의 딸'이라는 글귀를 새긴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베넷의 어머니, 아와지야 쯔루(1848~1911)가 오페라 <나비부인>의 여주인공인 초초상의 실제 모델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작가 중에는 아와지야 쯔루가 <나비부인>의 모델이라는 오랜 이야기의 구조가 궁금해서 책까지 펴내 '실제 모델이 아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이같은 반론에도 아와지야 쯔루가 살았던 일본 나가사키 집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으로, 오페라의 무대배경과 일치하다보니 일본이 '<나비부인>의 집'이라고 관광상품으로 스토리텔링해 놓았다. 직접적 관련 근거는 희박하지만 일본이 관광상품 콘텐츠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천시립박물관이 조사한 '인천 외국인 묘지'의 책임을 맡은 이영미 건양대 교수는 "오페라 나비부인의 삶과 베넷의 어머니의 삶은 내용이 너무 다르다"면서 "하지만 오페라가 실존 인물의 삶을 그대로 그린 것은 아니기에 역사적 고증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릴 성질의 문제는 아니다. 다만 딸인 베넷이 실제 모델이라는 이야기는 분명 잘못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녀의 남편 월터 베넷은 홈링거상사 지점과 홍콩상하이은행(현재 HSBC은행의 전신) 대리점 운영으로 출발해 1902년 일영무역상회를 열었고, 1906년부터는 광창양행으로도 알려진 베넷상사(Bennett & Company)를 운영했다. 그는 1915년부터 20년 동안 제물포 주재 영국 명예 영사를 역임했으며, 아내가 죽은 후 귀국해 영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44년 사망했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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