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 논설위원
▲ 김진국 논설위원
'긴담모퉁이'에 쪼그려 앉아 있던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검푸른 밤하늘에 별들이 명멸하고 있었다. 쓰-윽. 옷소매로 얼굴을 훔쳐낸 아이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Good boy!"(노래 잘 하는 꼬마)라며 독갑다리 근처 부대 미군병사가 준 초콜릿이었다. "와이즈 맨 세이~". 종이에 녹은 초콜릿까지 싹싹 핥아먹은 아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캔 헬프 폴링 인 러브'(Can't Help Falling In Love)였다. 영어를 몰랐지만, 아이는 귀에 익은대로 아무렇게나 읊조렸다. 신포동 외국인클럽 앞을 오가며 많이 들었던 음악이었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인천 출신 국민가수 송창식을 키운 건 신포동에 흐르는 음악이었다. 1960년대 국민애창곡 '해변으로 가요'를 히트시킨 키보이스 리더 김홍탁이 성장한 곳도 신포동이다. 동산중 2학년때, 신포동에 살던 미군에게 기타를 배운 그는 훗날 키보이스를 결성해 '한국의 비틀스'로 불리며 우리나라 대중음악에 큰 획을 긋는다.

인천 중구 신포동과 함께 우리나라 대중음악 산실을 꼽으라면 에스캄(ASCOM) 부대가 있던 부평이다. 1950~1970년대 부평 신촌(산곡동 현대아파트 앞길)이나 삼릉(부평2동)지역엔 '루비살롱', '아폴로클럽'과 같은 외국인클럽 수십개가 불야성을 이뤘다. 이런 도시 분위기 속에서 소리새, 구창모, 최성수, 유심초, 백영규와 같은 대중가수가 많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음악도시 인천'을 부르짖기엔 '2%' 부족하다.
1947년 12월13일 인천 제1공회당(현 인성여고 강당)에선 '인천관현악단' 창단 기념 연주회가 열렸다. 김기용 단장, 박수득 악장을 비롯해 23명이 모인 인천 최초의 오케스트라였다. 1885년 선교를 위해 인천항으로 들어온 아펜젤러는 인천사람들에게 서양 클래식음악의 모태인 종교음악을 들려줬고 인천사람들은 이를 빨리 받아들였다. 그게 우리나라 클래식음악의 시작이었다. 민중가요는 또 어떤가. '상록수'는 김민기가 부평의 봉제공장에 다닐 때 동료 합동결혼식 축가로 작곡했고 안치환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경우 고 박영근 시인이 80년대 부평공단에서 지은 시를 바탕으로 만든 곡이고 보면 인천이 '대중음악-클래식-민중가요'를 아우르는 음악도시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지난 주 문을 연 인천문화재단 '인천음악플랫폼'이 우리나라 음악의 중심도시 인천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