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을 막 돌아서던 참이었다
단풍잎이 책갈피가 아닌 車갈피에 꽂히는
싸늘한 아침나절이었는데 모든
꽃들이 땅에 첫발을 딛은 지 여러 날이 지났는데

옷 주워 입고 일어서는 들병이마냥
버려진 화단 한쪽에서
땅을 치고 일어나는 노란 꽃빛이 들렸다
헌것도 아닌 새것만 피워들고
꽃 진 허공에 제 모가지 꿰 맞추려
늘어진 허리 들어올리는

직장 가는 길 돌려
西三陵 옆구리에 같이 누워 뒹굴면
샛노란 나의 정사는
새로운 왕조의 가을 아침에 닿았겠구나


유종인은 인천 출신의 대표적 시인이다. 첫 시집 '아껴 먹는 슬픔'을 비롯하여 최근에 발간된 '숲시집' 등 여섯 권의 시집을 상재한 중견 시인이다. 그의 시적 상상력과 언어적 구성력은 '자연'과 '서정'의 힘에서 나온다. 이번에 내가 고른 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그의 작품 '들국화'이다. 내가 이 시를 고른 이유는 그의 시적 감성과 독자적인 구성력을 들여다보기 위해서이다.
단풍잎이 차창(車窓)에 꽂히고, 모든 꽃들이 시들어 떨어진 싸늘한 가을 아침. 시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버려진 화단 한쪽에서/땅을 치고 일어나는 노란" 들국화이다. 이제 막 피려고 하는 노란 꽃빛을 피워들고 들국화는 기지개를 켜듯 허리를 들어올린다. 그러나 이때 시인이 주목하는 대상은 '노란 꽃빛의 들국화'가 아니라 "꽃 진 허공"이다. "꽃 진 허공"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지만 시인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꽃 진 허공"은 새로 피울 꽃의 길을 인도해 준다. 허공이 새로 피울 꽃길을 인도한다는 인식은, 동양화의 오래된 화법, 곧 '홍운탁월(洪雲拓月)'의 기법을 연상시킨다. 그러니까 달을 직접 그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 여백을 그림으로써 달을 드러내는 것. 그것은 곧 있음과 없음의 경계를 해체하는 일이며, 무를 통해 유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자신을 고집하거나 드러내지 않으며, 항상 상대를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의 소산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 이성의 폭력이 없는 세계와의 교감과 소통을 중시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있음과 없음, 주체와 객체는 동질적 관계 속에서 수평적인 위치에 놓인다. 다시 말해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가 상호의존성을 띤다는 말이다. 인간과 자연이 상호의존할 때, 인간은 자신의 존재규명에서 자연을 배제하거나 폭력적으로 권위를 발산하지 않는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이러한 것이 유종인 시인이, 보이는 사물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배경을, 실체보다는 그 실체를 떠받들고 있는 허공을 주목하는 이유일 것이다.
/강동우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