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 화성.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 묘를 풍수지리가 가장 좋은 수원부 관아 뒤(화성 융릉)로 옮기자, 수원은 팔달산 기슭에 새 터를 잡게 됐다.

조선시대에는 왕릉이 들어서면 주위 10리 민가를 철거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전 후 수원도호부는 화성유수부로 승격(현 기초지자체→광역지자체)됐으나 고종 때 수원군과 남양군으로 분리된 후 일제강점기 때 여러 변화 과정을 거쳐 1949년 현재의 수원과 화성 체제로 개편됐다.

사적은 앞에 지역명을 넣어 칭하므로 수원 화성이라 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방화수류정 등 보물만도 4동이다.

정조는 정든 고향을 떠나는 백성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10년 동안 세금을 면제하고 조정에서 빌린 환곡을 탕감해 줬다.

또 이주비용으로 10만냥(60억원)을 지원하기도 했다.

동양 최초의 신도시, 수원 화성의 또 다른 주인공은 설계자 정약용이었다.

그는 유형거와 거중기라는 과학기기를 발명, 10년 공사기간을 2년 9개월로 단축시켰다.

유형거는 바퀴가 크고 튼튼한 수레로 무거운 짐을 싣고도 경사면을 쉽게 올라갈 수 있었고, 거중기는 도르레를 이용해 무거운 물체를 작은 힘으로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이렇게 태어난 수원화성의 총 길이는 5743m, 높이는 평균 5m다.

대부분 돌로 쌓았지만 중요한 방어시설은 벽돌로 쌓았다.

신소재 벽돌은 화포 공격에 무너지지 않고 잘 버텼기 때문이다.

또 성벽 위에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1.2m의 담장을 쌓았는데, 이를 여장이라 했다.

이 곳에 총을 쏠 수 있게 세 개의 구멍을 뚫었다.

성벽 아래를 향한 것을 근총안, 양 옆에 수평으로 만들어진 것을 원총안이라 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