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익희 생가.
경기도 광주시에 20세기 초 경기지역 중소지주 가옥 형태를 잘 간직한 한옥이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134호 신익희 생가다.

신익희 선생은 임진왜란 때 탄금대 전투에서 순국한 신립장군의 10대손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부질없이 감상에만 흐르지 말고, 개화 진보한 일본에 가서 배워 그 놈을 이기고 일어서야 한다"며 와세다대학 정치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졸업 후 귀국해 잠시 교편을 잡았던 선생은 남대문 역 앞에서 대규모 제2차 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고종의 인산에 참배하고 귀향하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되고, 3·1운동은 지방으로 확산됐다.

하지만 이 일로 선생은 농사꾼 차림으로 중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드는데 노력하는 한편 중국 학생과 한국 청년 500명을 모집해 유격대를 만들고 훈련시켰다.

이후 장개석을 만나 한·중 합작 일본군 토벌을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장개석이 중국 통일문제로 여유가 없었던 관계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광복 이후 귀국한 선생은 반탁운동을 선도했고, 국회의장으로도 활동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사상 최고의 정치 슬로건이라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를 기치로 내걸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호남으로 내려가던 열차 안에서 뇌졸중으로 급사했다.

국민들은 185만의 무효표를 던짐으로써 그를 추모했다.

20세기 초 영국의 한 여성은 "여성에게 참정권을"이라 외치고, 달리는 국왕의 말 앞에 목숨을 바쳤다.

하지만 남성들은 경마대회를 지연시킨 골칫거리로만 취급했고, 이에 격분한 여성들이 대거 봉기해 15년의 투쟁 끝에 보통선거를 이끌어냈다.

지금은 당연하게, 때론 귀찮게마저 느껴지는 선거권은 오랜 기간 많은 이들의 '피, 땀, 눈물'로 이뤄낸 소중한 권리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을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행동없이 불평만 하는 자'도 보호받지 말아야 한다.

정치·사회에 불만을 갖기 전에 감시자·주권자로서의 할 일을 공정하고 성실하게 다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