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이장군 묘.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다하리.

남아 스물에 나라를 평안케 하지 못하면, 뒤에 누가 나를 대장부라 부르리오.

화성시 비봉면에 비운의 젊은 무장 남이장군 묘가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13호다(강원도 남이섬에 있는 무덤은 문화재로 공인받은 것은 아니다).

설화에 따르면 남이는 어렸을 때 권람의 집으로 들어가는 여자 귀신을 보고 뒤따라 들어가 낭자의 가슴에 앉아있던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낭자를 살려낸다.

좌의정 권람의 사위가 된 남이는 권람 딸과의 사이에서 남구을금이라는 딸 하나를 두었으나 일찍 사별했다.

이후 고성 이씨와 재혼했으나 고부 갈등이 심하여 세조의 허락을 받고 이혼했다.

당시 세조는 중앙집권 강화를 위해 북방 출신을 견제했고, 이에 함길도 호족 이시애는 여진족과 힘을 합쳐 난을 일으켰다.

또 마타도어(흑색선전)도 함께 퍼트려 한명회와 신숙주까지 투옥시키니 세조의 위기였다.

이때 26세 풍운아 남이장군이 나타나 가는 곳마다 적을 쓰러트리고 난을 평정한다.

화살 4~5개를 맞아도 낯빛이 태연했던 남이는 다음해 병조판서(現 국방부장관)로 발탁된다.

하지만 예종으로 정권이 교체된 지 1달.

조선 3대 간신으로 뽑히는 유자광이 "혜성이 나타나자 남이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라 말했다"고 고변한다.

이에 남이와 그의 어머니는 거열형에 처해지고, 딸만 한명회의 노비가 되었다가 이듬해 외조부 권람의 공이 참작돼 사면됐다.

남이장군이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듯이 우리도 미래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해야만 한다.

혹자는 '가지 않은 길'을 안타까워하며 멀리 끝까지 바라봤고(로버트 프로스트), 어떤 이는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묵묵히 걷기도 했다(도쿠가와 이에야스).

또 성경에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도 하였다.

오늘 우리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