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저서원.
김포시 감정동에 우저서원이 있다. 학자이자 의병장이었던 조헌을 기리고 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다.

대원군 서원철폐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지금은 무료 풍물체험, 주부대학, 청소년 역사교육 장소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호이다.

조헌은 10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김씨 밑에서 성장했다.

몹시 가난해 다 해진 옷을 입었지만 추운 겨울바람에도 멀리 떨어진 글방 가는 것을 쉬지 않았고, 밭에 나가 농사일을 도울 때나 방에 불을 땔 때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22세에 성균관에 진학하고 24세 젊은 나이에 관직에 나아갔지만, 강직한 성품으로 공직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불상을 모시고 향을 올리는 관행을 폐지하자는 '논향축소'를 올려 선조의 노여움을 샀고, 3일간 도끼를 짊어진 채 도요토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청하기도 했다.

여러 갈등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충북 옥천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고 청주성을 되찾았다.

기세를 몰아 관리들과 함께 일본군을 공격하고자 했지만, 조헌의 공을 시기한 관리들은 오히려 의병들의 가족을 감옥에 가뒀다.

이에 의병을 포기하는 사람이 속출했고, 1000명이 넘던 조헌의 의병은 700명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의병들은 충남 금산에서 쇠스랑과 몽둥이를 들고 일본 군사 1만명과 맞서 싸웠고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며칠 후 조헌의 제자들이 시체를 거두어 무덤을 만드니 이것이 '칠백의 총'이다.

선조는 조헌을 간귀(奸鬼)라 했고, 동인(東人)들은 인요(人妖)라 모욕했다.

또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의기가 복받친 고지식한 위인이라 평했고, 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 했다.

잘 살아간다는 것은 현명하다는 말이다.

다치지 않을 만큼 참을 줄 알고, 마음과 상관없이 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진실, 정의 등의 개념과는 다르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 할 순 없겠지만 '눈 맑던 나'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음은 아쉬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