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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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기슭에서 온 말린 국화 몇 송이를 띄웠다. 찻잔 속에 노란 꽃이 피고, 담갈색 찻빛에 은은하고 단아한 가을향이 올랐다. 신선한 차를 음미하면서 상념과 사색의 가치를 더하게 된다. 사계를 풍미하는 커피의 맛과 향에 매혹된 사람도 많다. 지난해 우리나라 성인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은 377잔으로 일상 속에 서양 커피문화는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커피 판매시장은 6조4041억원으로 해가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전통차와 커피는 흔히 카페인의 효능과 부작용을 비교하며 개인 간 선호의 갈등을 부추긴다. 하지만 요즘 자신의 취향에 따라 맛을 선택하고 즐기는 소비자들도 등장했다. 먹을거리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접목해 심미적 갈등의 절충점을 찾아나선 '모디슈머(Modisumer)', '크리슈머(Cresumer)'들이다. 모디슈머는 'Modify(수정하다)+Consumer(소비자)', 크리슈머는 'Creative(창조적인)+Consumer'의 합성어이다.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주문할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짬짜면'으로 갈등은 한 순간에 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녹차·막걸리와 아메리카노가 조합되고, 소금라떼가 팔리고 있다. 티(tea)와 초콜릿이 어우러지는 기상천외한 레시피도 탄생했다. 피자와 제과업계에서도 새로운 맛의 조화를 구현하는 모디슈머의 활약이 이어지고 있다.


맛을 창조하는 음식의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첨예한 갈등이 파생된다. 최장 열흘간의 추석연휴 동안 100만여명이 해외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다. 해외에서 여행객들이 마신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짐작된다. 하지만 연휴기간 대한민국 내외의 정황은 찻잔 속의 여유를 향유할 정도로 편안하지 못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총기난사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초강경 발언과 김정은의 핵도발은 북핵위기를 절정으로 몰고 있다. 스페인 북동부 가탈루냐 주는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나섰다. 북한이 개성공단을 불법 가동했으며, 한미FTA협상이 테이블에 올랐다. 중학생 딸의 친구를 살해유기한 '어금니 부녀' 사건 등 강력사건도 이어졌다. 정치권의 갈등은 더 분주했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적폐청산', '정치보복' 등 대립된 여야의 가시 돋친 설전은 갈등의 악순환을 보는 듯하다. 시간이 갈수록 진영논리에 치우쳐 중도의 주장을 찾아보기 어렵다.

투쟁이 현대 민주정치를 발전하게 한 원동력이라고 하지만, 전통적으로 갈등의 핵심 요인은 '경제'에서 비롯된다는 칼 마르크스 사상이 아직도 유효하다. 경제 토대가 다양한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주장이다. 인간은 한정된 재화를 두고 끊임없이 경쟁하는 존재이고, 바로 갈등 사회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결국 갈등은 권력과 돈을 쥔 지배계급의 강제력에 따라 통제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막스 베버는 경제여건 외에도 갈등은 권력으로부터 형성된다고 했다. 이미 정치권력의 갈등은 예견된 일이다.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각축장이 바로 정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기여한 갈등의 순기능에 기대해 왔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갈등구조는 심각한 수준에 도달하고 말았다.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이혼, 가출, 실업, 빈곤, 비행, 비리, 윤락, 자살, 중독, 교통체증, 공해 등 다양한 사건들이 문화·경제적 갈등으로부터 양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재생산되고 있다는 우려도 계속된다. 


공공선에 기여한 로마의 훌륭한 법률과 제도는 평민과 부자의 파벌 갈등을 극복함으로써 만들어졌다. 하지만 개인의 이기적인 의도에서 시도된 파당과 파벌은 사적이고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한정된 재화를 차지하려 투쟁했다. 무력충돌과 유혈사태로 로마의 몰락을 가져온 농지법은 갈등의 부정적 영향을 반증하는 하나의 역사적 사례이다. 또 대한민국의 사회갈등지수가 OECD 국가 중 상대적으로 매우 높고, 그 결과 경제적 손실이 크다고 지적하고 있으나 정치사회적 의미로서 갈등은 민주정치의 위기상황을 여러 번 극복해 온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악의적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갈등 조장이 도를 넘고 있는데도 갈등을 풀어 나갈 만한 마중물 하나 만들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지도자다. 갈등은 적대가 아니다. 개인의 이익을 넘어서는 공공의 이익에 합의하고, 상대를 용인하는 것이다. 녹차와 커피를 조합하는 맛의 세계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창의적 조화를 발견하는 모디슈머와 크리슈머를 갈망하게 된다. 


화원 앞마당 화분을 가득 덮은 노란 국화 무리가 가을 문턱을 넘어 왔다. 국화는 화해를 상징하는 꽃이다. 꽃 한 송이에도 인내와 희생이 있다. 갈등은 필요악이다. 이데올로기와 진영논리에 휩싸인 상호견제로는 선의적 갈등과 경쟁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이 가을, 꽃 한 송이 들고 찾아가 커피 한 잔 나누는 갈등 치유의 묘미를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