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와의 첫 통상…세계로, 근대로 나아간 디딤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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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2년 조영수호통상조약 체결 일러스트
 
조약(條約)은 총성없는 전쟁이다. 우리는 국제질서, 곧 조약이 갖고 있는 위력을 오늘날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통해 일상생활에서 실감하고 있다. 19세기 조선은 미국 등 서구 열강의 개방압력에 떠밀려 조약을 맺고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하지만 이들 조약은 함대를 앞세운 폭력성을 띤 '포함외교'였기에 그 내용도 불평등 조약이었다. 조선은 국제질서에 무지했으며,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정당한 지위를 보장받지 못했다. 서로 총구를 겨누다가도 테이블에 앉아서는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아야 하는데, 군사력 등 국력에서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한 국가의 이익은 국력에 비례한다는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실감해야 했다.

역사적으로 서구의 동양진출을 지칭하는 서세동점 현상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최첨단 무기를 앞세우고 국가가 주도했는데, 이는 선교사의 종교 전파를 시작으로 상인진출을 통한 교역 확대로 이어지던 그 전과는 성격이 달랐다. 중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운 영국과 아편전쟁(1842년)을 치른 끝에, 일본은 최신예 군함인 흑선(黑船, 구로후네)을 앞세우고 무력시위(1854년)를 벌인 미국에 굴복해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고 각각 문호를 개방한다.

그러나, 조선은 이들 국가와 다른 경로를 밟았다. 중국과 일본이 서양의 개방 압력을 받은지 20년이나 지난 뒤, 조선은 프랑스(병인양요 1866)·미국(신미양요 1871)과 전쟁까지 치르지면 끝내 그들의 개방요구를 거부했다. 오히려 '서양과의 화친은 곧 나라를 파는 일'이라며 개방 반대 의지를 확고히 천명했다. 또 조선에 개방을 요구하는 국가는 당시 세계 최강이던 영국이 아닌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과 프랑스였다. 특히 같은 동양 문명권이며, 자본주의 열강과 불평등 조약 체계 아래에 있던 일본이 조선 개항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조선은 미국 등 서구 열강과 인천 제물포에서 조약을 체결하고 인천항을 개방하면서 세계에 문을 연다. 각국과 맺은 수교는 세계로, 근대로 나가는 길이었다. 개항기 인천의 외교위상을 짚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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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2년 조독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사진

#조선, 금수와 통상을 허락하다
인천 제물포는 쇄국의 빗장이 풀리고 조약체결지가 되면서 일약 국제항구로, 한국 외교 1번지로 급부상한다.

조선은 1882년 5월 인천 중구 북성동 3가 8-3(자유공원 입구)에서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전권대관 신헌과 부관 김홍집이 미국 전권위원 해군 대장 로버트 슈펠트와 마주 앉아 신임장을 교환하고 전문 14조의 조약에 서명했다. 미국정부는 비준을 완료하고 1883년 초대 공사로 푸트를 임명한다. 그가 비준서를 가지고 그해 5월 조선에 부임하면서 조선과 미국은 공식외교관계를 수립한다.

서양 열강과 최초로 맺은 근대조약이었다. 조약 내용은 조미 양국 사이에 우호관계를 증진할 것을 약속하지만, 치외법권과 최혜국 대우를 보장해 주고 높은 수입 관세율을 규정한 조약이었다.

1871년 미국이 제너럴셔만호 사건(1866)을 빌미로 군함 콜로라도를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한지 11년만에 조선과 미국은 적대관계를 청산한 것이다. 1876년 조선이 운요호사건을 도발한 일본과 강화도 연무당에서 최초의 근대 조약인 강화도 불평등 조약을 맺은지 6년 만이다.

'금수의 나라와는 화친할 수 없다'며 버티던 조선이 '금수'로 규정했던 서구 열강을 상대로 동아시아 삼국 중 마지막으로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이후 조선이 서구열강들과 교류함으로써 근대국가로 나가는 자발적인 개화의 의지를 드러낸다. 그 현장이 바로 인천이고, 인천의 바다에서 일어난 일이다.

서구 열강과 만남은 인천 제물포라 불리는 작은 포구에서 시작됐다. 1883년 인천 제물포의 개항은 위기인 동시에 기회였다. 조선시대의 바다를 통한 대외무역 중심지가 동래부 부산항에서 인천항으로 바뀌는 계기였다. 또 서울과 인천간 도로를 이용한 화물수송이 활발해짐에 따라 조선의 전통적인 화물운송로가 수운(해운)에서 육상교통으로 바뀌는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개항과 함께 서구문물이 급속도로 들어왔다.


#조약 체결지 인천 제물포
조약 체결지는 모두 인천이었다. 최초의 개항장 인천 제물포는 점차 외국의 선박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근대 인천항의 모습을 갖춘다. 청국과 일본 등 외국인들의 거류지가 생기고, 항구 주변으로 관공서와 철도, 우체국 등 근대 시설물과 호텔과 은행, 외국인 별장 등의 시설들이 들어서는 등 개항장은 세계 각국이 모이는 새로운 장이 된다.

비록 외세에 눌린 굴욕적인 개방이지만 제물포는 그 외교교섭의 현장이며, 정치·경제·군사·외교의 요충으로서 한국 근대사의 산증인이 된다. 인천이 대한제국에서 근대국가로 발돋음 하는 디딤돌 역할을 한 것이다.

미국은 조약 체결 이후 인천에서 물적, 인적 교류를 시작한다. 거상 타운센드, 총영사 대리 알렌, 경인 철도 부설권을 손에 넣었던 모오스, 하와이 이민 사업을 주선했던 데쉴러 같은 이들은 일본 등 다른 열강 국가 사람들과 함께 인천에서 치열한 이권 다툼을 벌인다. 이에 반해 인천 개신교의 기반을 닦은 선교사 아펜젤러, 의료 활동을 펼친 약대인 랜디스, 영화학당을 키워온 존스 목사 부부 등은 인천의 문물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미국과 조약을 체결한 그해 5월 말 영국과 조영수호통산조약을 맺는데, 여기서 개항장으로 '제물포'라는 지명이 국제 조약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다. 그해 6월 초 역시 인천에서 조독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1883년 임오군란의 발발과 일본 공사관 습격으로 제물포 앞바다에 정박한 일본 군함에서 체결한 제물포조약도 인천에서 맺은 국제 조약이다.

이어 이탈리아(1884), 러시아(1884), 프랑스(1886), 오스트리아(1892), 벨기에(1892), 덴마크(1892) 등과 차례로 통상 조약을 맺는다. 수호조약의 내용은 역시 조미·조영·조독 조약의 조문내용이 동일하며 이를 모델로 삼았다.

노영돈 인천대 교수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은 조선 쇄국정책의 종결,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 종료, 구미 제국주의 국가에 최초 개국, 뒤이은 다른 서구 제국주의국가들에 개국 계기, 구미 자본주의의 유입, 서구적 근대국제법의 무지와 수용 필요성의 인식, 서구적 근대국가성의 인식, 식민지화의 시작 등의 의의를 갖는다"고 했다. 


#제물포에 들어선  4개국 영사관
일본과 중국, 영국, 러시아는 조약을 체결하고 나서 인천 제물포에 영사관을 설치하고 자국민의 권익 보호와 통상 확대에 본격 나선다.

일본이 개항장 인천에 가장 먼저 영사관을 설치한다. 개항전인 1882년 10월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 양식 2층 목조건물을 신축해 본격적인 영사업무를 시작했다. 영사관에는 우편국, 경찰서, 감옥 등 초법적인 부속시설을 둬 그들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은 1884년 청국 조계가 설치되자 그 해 10월 지금의 인천중산학교 자리에 영사관을 열었다. 이들 역시 영사관 안에 전보국과 순포청(일종의 경찰서) 등 부속 건물을 세웠다. 영사관은 변리청, 이사서, 이사부 등으로 불렸으나 '청관(淸館)'이라 칭하기도 했다.

영국은 1884년 3월 지금의 중구 북성동 올림포스 호텔 자리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1887년 신축한 영사관 건물은 6·25전쟁 때 전소됐으나, 설계도는 남아 있다.

러시아는 1902년 10월 부영사관을 설치해 성누가병원을 임대해 사용하다가 1903년 지금의 인천역 옆에 2층 벽돌 건물을 신축한다. 그들은 주로 경제 이권 관련 업무에 치중했다.

이렇듯 인천은 4개 국가가 영사관을 설치하고 자국의 이익 확보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 국제도시였다. 그러나 을사늑약 바로 전인 1904년 12월 외교관, 영사관제를 폐지하면서 각국 주재공사가 철수하고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한다.

개항기 인천은 외교 중심지였으나, 130여년이 지난 오늘, 인천 지역에는 영사관이 한 곳도 없다. 오늘날 인천의 위상은 외교사적, 경제사적 측면에서 개항 당시보다 더 뒤처진 것은 아닐까.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
 


'오류 투성이' 인천 근대사

조약 체결 장소 3번 바꾸고

표지석은 아직 엉뚱한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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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근대사에는 '최고' '최초'가 많다. 그만큼 오류도, 탈도 많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장소가 3곳이나 된다. 아이러니하다.

'해관 관리관 사택 부근에 천막을 치고 조약을 체결했다'고 했는데, 그 구체적 장소가 이견으로 3번이나 바꿨다. 2013년 당시 인천세관에서 근무하던 김성수 과장이 옛지도에서 발굴한 '인천해관장 관사터(D Lot No 39)', 즉 자유공원 청일 조계 경계 계단 위쪽인 '인천 중구 북성동 3가 8-3'를 조약 체결장소로 고증해 바로 잡았다. 그런데 실제 체결장소가 아닌 것으로 밝혀진 곳(인천 동구 화도진공원과 중구 인천올림포스호텔)에 세워진 표지석이 아직 철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여기에 인천일보가 1900년대(그것이 1912년이든지, 1920년이든지) 인천도호부청사 발굴 사진을 보도해, 현 도호부청사가 '짝뚱 복원'이라는 논란에 휩싸였다. 규모나 배치구조를 구체적으로 비정하는 작업이 복원사업의 첫번째 작업일진데, 인천시가 복원의 첫 단추를 잘못 낀 것이다.

더욱이 조미수호통상조약체결지나 도호부청사 사진 같은 역사 사료들은 인천시가 발굴해 낸 것도 아니다. 민간이나 화도진도서관에서 발굴, 새로운 사실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니 올바르게 대처해서 수습해야 할 인천시는 변죽만 울리며 혼란을 야기할 것이 아니라 하루빨리 역사적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한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