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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왜 해양도시인가] 2. 개항장의 꽃, 관세 행정기관 '인천해관'

작은 포구서 오늘날 개항장 키워 낸 '바다의 관문'

2017년 09월 28일 00:05 목요일
▲ '인천 명소' 엽서 사진 속 인천세관 모습.
▲ 인천항 세관 부근의 광경.
▲ 해관지 문서들.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日 정부 무력 외교로 세권 잃어 1882년 美와 첫 통상조약 체결

5~30% 거둬 시설비·임금 사용… 왕실 비자금 관리 창구 역할도



'바다를 다스리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했다. 인천만을 품은 황해가 그렇다. 한·중·일은 물론 러시아·프랑스·미국 등 서구열강이 황해를 놓고 패권을 다퉜다. 강화도와 김포 사이에 있는 강같은 바다, 염하(鹽河)는 해상교통은 물론 군사적 요충지였다.

조선시대 삼남지방 세곡선(稅穀船)이 이곳을 거쳐 한강(한양)으로 들어갔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치른 격전지였다. 그 물길은 북한 신의주까지 오고가던 뱃길이었다. 해협의 빠른 밀물 물살처럼 외세는 바다를 타고 화살같이 밀려왔다.

그들은 마을을 불사르고 사람을 죽이고 금은보화를 훔쳐가고 국토를 유린하더니 나중엔 나라마저 통째로 빼앗았다. 그렇게 황해 인천 앞바다는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개항기 숨가쁜 역사의 소용돌이가 조그만 포구 제물포를 덮쳤다. 결국 인천이 열리고, 조선은 무너졌다.


▲ 국제 무역항으로 급부상한 제물포

인천은 열린 창이었다. 조선 정부는 '도성(都城)의 인후(咽喉)'라면서 인천의 개항을 반대했지만 헛수고였다. 500년 굳게 닫힌 조선의 빗장은 강화도조약이라는 한낱 종이 문서에 풀렸다. 조약으로 포장한 강제 개항은 바다를 향한 진출과 도전의 의미는 약했다. 외래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이고, 그들의 온갖 수탈을 정당화 시켜줬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1877년부터 시작한 서해안 일대 측량을 끝내고 나서 인천만 제물포를 개항장으로 지정, 이를 관철시켰다.

일본은 개항장이 단순한 무역항 그 이상이기를 바랐다. 정치·군사·경제적 침략을 염두에 두고 제물포를 선택한 것이다. 3개 개항장 후보지 중 대마도와 교역을 하던 부산항은 조약을 체결하면서 확정했다.

이어 일본은 해군을 파견해 해안을 측량하면서 용의주도하고 정략적으로 접근, 동해안에서는 러시아의 남침을 저지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중간 기착지로 원산항을, 서해안에서는 서울과 가까운 인천항을 개항장으로 선정했다. 서울과 가장 가까운 개항장 '제물포'는 이후 외국문물이 들어오고 방문자들이 입국하는 중요항구로 세계에 알려지며 급부상한다.

개항 당시 인천항은 인구 70여명의 제물포라는 작은 포구였으나, 그 후 130여년이 지난 오늘날 인천은 300만 거대 항구도시로 성장, 발전했다.


▲개항장 행정 도맡은 '바다의 관문'

인천해관(海關)은 인천항을 개항하던 해에 제물포에 설치됐다. 현재 인천항 3부두 뒷편에 있는 인천(본부)세관의 본래 명칭이다. 세관을 뜻하는 해관은 조선말기 개항장에 창설된 관세행정기구를 말한다. 대외 관계에 있어 '바다의 관문'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 명칭은 1907년 일본식 명칭인 세관(稅關)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항장은 외국과 무역하기 위해 개방한 항구다. 무역선이 공식적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특별히 허가한 지역이다. 개항장에는 무역 물동량에 관세를 징수하는 기관인 해관이 들어섰다. 그러기에 해관은 외국의 배와 사람이 들어오고 외국으로 배가 나가는 것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길목에 자리를 잡았다. 해관은 개항장의 중심 기관이었다.

관세징수는 한 국가가 외국 상품유입에 맞서 국내산업을 보호하는 수단이며, 중요한 국가재정수입원이었기에 외국과 통상관계를 맺을 땐 반드시 수반되는 제도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 정부의 무력외교와 기만외교, 그리고 자신의 무지 등으로 근대국가의 2대 주권, 법권(法權)과 세권(稅權)을 잃고 말았다.


▲관세 징수 자주권의 확보

뒤늦게 조선은 제물포에서 서양국가로는 미국과 첫 조약을 체결하고 비준함으로써, 관세를 징수할 수 있는 토대를 비로소 마련한다. 바로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미국으로부터 관세의 부과 징수권을 인정받아 어느 정도 관세 자주권을 확보한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은 7년동안이나 무관세 무역의 특혜를 누리며 조약개정을 거부하던 일본마저 협상테이블로 불러 냈다.

이후 조선은 관세 사무에 밝은 서양인 묄렌도르프를 초청해 해관을 관리하도록 했다. 마침내 제물포에 들어선 인천해관은 경기, 충청, 전라, 황해, 평안 5도를 관할 구역으로 해 1883년 6월16일 수세 업무를 시작했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일이다.

부산(1876), 원산(1880) 다음으로 인천(1883)이 개항했지만, 해관은 인천 제물포에서 가장 먼저 창설된 것이다.

개항과 함께 일본과 청국 상인을 비롯해 서양상인들이 인천에 들어왔다. 인천은 서양의 상사(商事)가 설립된 우리 나라 최초의 항구였는데, 그 효시는 독일의 세창양행이고 영국의 이화양행, 미국의 타운센드 순으로 찾아 들었다. 이들은 면직물과 석유, 설탕, 밀가루, 화약 등을 수입해 팔고, 우리 나라에서는 미곡과 홍삼, 우피, 해산물 등을 수출했다.


▲고종의 비자금 관리

근대적 행정기관 인천해관은 개항장 인천이 외국과 근대적 무역관계를 형성하고 무역항으로 발돋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구한말 정부의 재정조달 창구였으며, 근대 해운업 발달의 자금줄이었다. 무엇보다 거기에서 돈이 나왔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은 화물에 '관세'라는 세금을 부과하는데, 일반 상품과 사치품 등 등급에 따라 5%~30% 수준의 관세를 거뒀다.

관세 수입은 개항과 더불어 신설된 각종 기관의 비용과 외국인 임금으로 사용했다. 이외에도 해관의 제반 시설비와 개항장 내 각국 거류지 공사비로 충당했다. 그리고 정부의 지시에 따라 유학생 파견비, 광무국의 경비, 외국 배상금 등으로 지출하고, 대외차관의 원리금 상환과 담보를 제공하는데 사용됐다.

특히 인천해관은 고종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창구였다. 당시 국내에는 일본계 은행이 있었으나 믿을 수 없고, 마땅히 자금을 보관할 곳도 없었다. 왕실에서 은화 등이 내려오면 인천해관은 이를 중국 상하이은행에 예치했다.

해관의 지배권은 열강의 힘의 균형에 따라 요동쳤다. 인천해관 초대 해관장으로는 영국인 스트리플링이 취임하고, 8대까지 외국인이 그 뒤를 이었다. 1906년 통감부 설치 이후부터는 일본인이 세관장을 맡는 등 식민통치의 전위 기구로 전락한다.

광복 후 인천세관은 비로소 자주적인 관세업무를 시작,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인천 해관은 오늘날 개항장 인천이 있도록 하는 중심기관이었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



▲ 인천해관 첫 청사 위치 논란①
1894년 미주간신문 Harper's Weekly에 실린 것이지만 촬영시기는 10년 전이다. 좌측 상단에 월미도 자락이 보이고 중간 언덕은 '해망대'다. 해망대 정상 두 화살표는 인천해관에 근무하던 서양인 2명(F. W. Schulze, A. Laporte)이 지어 입주한 주택이며 그 아래 타원형 점선 안 건물이 인천해관 첫 청사다.
▲ 인천해관 첫 청사 위치 논란②
1883년 말경 제물포 정황을 보여주는 지도. '1'의 위치에 첫 청사가 있었다. 해망대가 1884년 5월10일 영국영사관 부지로 제공된 이후 정상의 건물과 해관청사를 헐고 '2'의 위치로 옮기게 된다.

인터뷰/ 김성수 관세청 울산세관 감시과장

"우리가 알고있는 첫 청사 위치는 옮겨진 곳"



"'인천시 중구 항동 1가 1번지의 1호' 현 파라다이스 호텔 부근의 목조단층 건물을 사용했다."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인천해관 첫 청사 위치다. 그러나 이곳보다 앞서 다른 곳에 첫 청사건물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10여년 넘게 해관을 연구해 오고 있는 관세청 울산세관 김성수 감시과장은 "인천부사에 게재된 사진속 건물을 인천해관 첫 청사로 여겨왔다"며 "미국의회도서관에서 소장한 일본군 장교 이소바야시가 그린 지도상의 세관 위치는 인천부사의 사진에 나타난 해관위치하고는 분명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 과장은 이같은 주장을 뒷바침하는 관련 지도와 도면을 제시하고 "인천해관 엔지니어 베코프스키가 그린 청국조계지와 해망대 부근 지도에 붉은 박스로 'Old Customs Office'라 표시한 부분이 등장한다"며 "이는 이소바야시가 그린 지도상 '稅關'위치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말했다.

그가 주장한 최초 청사 위치는 그 당시 선박의 입출항에 필수시설인 부두가 설치된 현 파라다이스 호텔과 인천역 사이로 들어선 건물을 추정하고 있다.

그는 "인천해관은 관세 등 징수 업무와 검역사무 등 정부의 개항사무를 총괄했는데, 제물포조계지를 설계하고 공식 기상관측정보를 생산했다"며 "항만의 수축과 항로표식의 설치는 물론 개항예정지 조사·측량, 선박등록업무 등 오늘날 개항장의 골격을 갖추는 일을 사실상 도맡아 했다"고 말했다.

김 과장은 "해관은 조선(대한제국) 정부소속 기관으로서 많은 일들을 수행하며 항구 인천을 인천답게, 개항사무를 주도하며 근대화를 주도했다"며 "오늘날 인천항을 비롯한 부산, 목포, 마산 등의 개항장들의 번영의 상당부분은 해관에서 비롯된 만큼 인천항은 해관에 빚을 졌다"고 말했다.

/이동화 기자 itimes21@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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