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국민방위군 징집' 심재갑옹의 6·25전 증언
▲ 6·25 국민방위군으로 참전한 심재갑(85)옹이 전쟁 때 매일 쓴 일기를 보여주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비참하게 아사한 장정들 … 살아남은 게 죄송

'위령탑 건립'묻혀 억울한 넋 어찌 위로 하나





'너무나 처참하다. 전쟁은 과연 너무나 비참한 것이다 ….'

6·25 전쟁 당시 19세의 나이로 '국민방위군'에 징집된 심재갑(85)옹이 기록한 일기의 일부다.

1951년 1월3일. 인천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심옹은 동인천 축현초등학교에 모인 장정들과 제주도로 이동해 군 생활을 했다. 심옹은 전쟁의 처참함을 이겨내기 위해 역사의 언저리로 밀려난 6개월간의 국민방위군 사건을 기록했다. 매일같이 굶주려 죽어가는 동료들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일은 괴로웠다.

심옹은 제주도 조천초등학교에서 보낸 첫날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좁은 교실에 200명이 뒤엉켜 있다가 북한을 따르는 무장대의 습격 소식을 듣고 황급히 대피한 날이었다.

"제주도에 간 첫날 초저녁부터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어요. 무장대의 습격이 시작됐고 2시간 동안 교실 마루 밑에 숨어있었죠. 무장대들이 한라산에 모여 민가를 습격했던 거죠."

심옹을 포함한 장정들은 행군을 하다가 주로 제주도 내 초교에 주둔했다. 하루는 장교가 장정들을 운동장에 집합시켜 육지에서 가져온 돈을 모두 내놓으라고 호통 쳤다. 장정들을 향한 핍박은 식량 중단으로 이어졌다. 주먹밥 한 덩어리가 전부였던 식사는 끊겼고, 정미소 벽에 붙은 쌀겨를 긁어먹거나 한라산 소나무 껍질로 연명했다.

"영양실조로 얼굴이 붓는 동료들이 급격히 많아졌어요. 병자는 따로 수용됐지만 약도 제대로 못 쓰고 그저 죽는 날을 기다릴 뿐이었죠."

그렇게 국가의 부름을 받은 장정들은 전투에 참여하지도 못한 채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국민방위군의 실태는 1951년 10월이 돼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통영, 부산, 김해 등지에서도 장정들이 굶어 죽은 사실이 전해졌다.

사건 조사 결과, 당시 돈으로 보급비 24억원과 쌀 5만2000가마가 군 고위급의 주머니로 들어간 것으로 드러났다. 일부는 정치권으로 흘러갔다. 국방부는 군사재판을 열고 관계자 5명을 사형시켰다.

심옹은 7년 전, 일기에 기록 된 동료들의 이름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유족들은 조상의 흔적조차 찾지 못하는 슬픔을 토로했다.

"2012년에 국민방위군 사건을 알리기 위해 국방부에 위령탑 건립을 요청했어요. 4800여명의 서명을 받아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국방부는 건립비 70%를 사비로 내야한다고 했죠. 결국 건립이 중단됐어요."

수많은 희생자들을 기리고 희생의 의의를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했던 심옹과 유족들의 소망은 묻혀버렸다.

"제주도에 갈 기회가 생기면 희생된 전우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꼭 가려고해요. 군번도 없이 한라산에 묻힌 장정들을 생각하면 살아남은 것이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우리를 대신해 죽어간 그들의 넋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

/김신영 기자 happy1812@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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