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공원
▲ 지난 3월1일 제98주년 3·1절을 맞아 시민들이 창영초등학교에서 동인천역 북광장까지 만세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동구 
▲ 인천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한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 /사진제공=계양구 
호국보훈의 달 6월. 친구, 가족과 함께 선조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나라사랑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볼 수 있는 인천 곳곳에 숨겨진 여행지를 소개한다.

▲수봉공원(인천 남구 수봉안길 84)
남구 숭의동, 도화동, 주안동, 용현동에 걸친 자그마한 수봉산은 물봉우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는 주안역 뒤편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멀리서 이를 바라보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봉우리처럼 보였다고 한다.

수봉산의 해발은 104m. 야트막한 산기슭에는 1982년에 개관한 인천문화회관과 이듬해 문을 연 은유탈춤전수관까지 전통문화의 향이 짙게 풍긴다.

수봉산은 호국 영령의 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는 현충탑을 비롯해 재일학도의용군 6·25 참전비, 무공수훈자공적비, 자유와 평화의 탑, 인천지구 전적비, 망향단 등이 있다. '호국공원'으로 명칭 변경을 추진할 정도로 호국 보훈과 관련된 시설이 즐비하다.

특히 재일학도의용군참전비는 타 지역에서 발견할 수 없다. 6·25전쟁 당시 재일동포 청년 학도 642명은 자발적으로 의용군을 조직해 위기에 처한 조국을 살리고자 전장에 뛰어들었다. 인천상륙작전 때는 미군과 함께 인천에 상륙해 장진호전투 등에 투입되기도 했다. 전쟁 중 135명(전사 52명, 실종 83명)이 희생됐으며 이는 이스라엘 청년들의 중동전 참전에 앞서 '세계 최초의 재외국민 참전'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자유공원(인천 중구 자유공원남로 25)
중구 차이나타운 뒤편 응본산 일대에 자리 잡은 자유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구한말 당시 인천의 제물포항은 외국 열강의 자본과 사람이 조선으로 들어오는 통로였고 이곳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위해 만국공원이란 이름으로 1888년 세워졌다. 각국공원과 서공원 등의 다양한 이름을 거쳐 1957년 10월3일 현재의 이름을 지니게 됐다.

인천항과 월미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공원이지만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장소이기도 하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천학도의용대는 자신들의 젊음을 조국에 바치기로 한다. 그해 12월18일 인천학도의용대 3000명은 축현초등학교에서 출정식을 갖고 마산까지 내려가 한 달 뒤 600여명은 해병대로, 1300명은 부산에서 육군으로 자원입대해 수많은 전투에 맞선다. 200여명의 전사자와 부상자라는 숭고한 희생이 뒤따랐다.

이들의 뜻을 기리고 후세에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우고자 2000년 8월31일, '인천학도의용대호국기념탑'이 세워졌다. 기념탑 돌판에는 당시 의용대 명단이 새겨져있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보초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말이다. 자유공원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장군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1880년 미국 아칸소에서 태어난 그는 1930년 육군 참모총장을 지내다 7년 뒤 미 육군 현역에서 은퇴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현역으로 소환된 그는 필리핀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전투를 수행하기도 했다.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6·25전쟁 때 주한 유엔군 사령관으로 발탁됐으며 최고 사령관직을 맡아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인천 연수구 청량로 138)
연수구에 위치한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은 한국전쟁 참전 군인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전세 역전의 계기가 된 상륙작전을 기리기 위해 1984년 9월15일 문을 열었다. 대지면적 7365평(24.347㎡)으로 2개의 실내 전시관과 영상실, 1개의 야외 전시관으로 구성됐다. 당시 무기와 군복, 영상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야외전시관에는 LVT, LCVP, LCM 등 상륙주정과 RF-86F 전투기 등 인천상륙작전 당시 사용됐던 대형 장비와 조형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옆에는 자유수호의탑이 자리 잡았다. 탑을 마주보고 서면 인천시립박물관과 연결된 길을 만날 수 있다.

기념관에서는 지난해 누적 관객 700만명을 달성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엿볼 수 있다.

인천 촬영지 중 한곳인 송도 석산에 조성됐던 바닥 지름 5m, 높이 8m의 팔미도 등대 재현물이 기념관 내에 전시되어 있다.

▲백범광장(인천 남동구 장수동 인천대공원)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적 장소다." 김구 선생은 그의 저서인 '백범일지'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1896년 3월9일.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있던 일본인 쓰치다를 살해했다. 그는 살인죄로 황해도 해주에 수감되었고 이후 인천 감리서로 이송됐다. 김구 선생과 인천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탈옥 이후인 1911년 안악사건에 의해 김구 선생은 다시 인천형무소로 이감된다. 그는 항만 건설 노역을 하며 힘겨운 옥중생활을 보냈다.

'이 시절에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는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익히면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사상을 정립했다' 당시 그의 심정이 그의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남동구 인천대공원 안에는 불굴의 민족항도자인 선생의 겨레사랑을 받들고자 1997년 '백범광장'을 조성했다. '백범 김구선생 동상건립 인천시민추진위원회'에서 시민 성금으로 마련해 더욱 뜻깊은 곳이다.

김구 선생 동상 옆에는 서울 효창동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전시관에서 옮겨온 그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동상도 함께 세워져있다.

▲인천창영초등학교(인천 동구 우각로 15번길)
창영초는 애국교육의 요람이라 불린다.

1907년 5월6일, 일본인 교사 1명, 한국인 보조교사 1명, 학생 3명이 모여 인천공립보통학교란 이름 아래 조촐하게 출발했다.

당시 마땅한 건물이 없어 인천 일어학교 교실 한 칸을 빌려 사용한 창영초는 1회 졸업생 18명을 배출하며 1912년 남학생 325명, 여학생 23명, 총 학급 6개로 성장했다.

외국의 도움 없이 순수 민족 자본으로 세워진 인천공립보통학교는 이후 인천 3·1만세운동의 발상지가 된다.

1919년 3월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으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자 인천에서는 당시 유일한 공립보통학교 고학년 학생들이 항일 동맹휴학을 일으켰다. 학교와 인천경철서간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야간에 교무실과 경찰서간의 전화선을 절단했으며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총동창회에서 당시의 고증자료와 재판기록문을 수집해 '3·1 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발상지기념비'를 건립했다. 창영초는 2002년 11월30일 국가보훈처로부터 현충시설로 지정받았다.

이와 함께 학교 한켠에는 '육군소령 강재구흉상'이 설치됐다.

제 40회 창영초 졸업생인 고 강재구 소령은 월남전 참전을 앞두고 순직했다. 맹호부대 수류탄 던지기 훈련 중 한 부하의 실수로 부하들의 생명이 위태롭게 된 순간 터지는 폭탄을 몸으로 끌어안아 자신을 희생시키고 부하들의 생명을 지켰다. 이 또한 같은 날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 받았다.

▲황어장터(인천 계양구 장기동 황어장터로 126번길)
창영초와 함께 인천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곳이 있다. 계양구에 위치한 황어장터다.

잉어와 민물고기인 황어가 많이 잡힌다고 붙여진 황어장터는 잡화와 곡물, 소를 거래하는 우시장으로 유명했다. 당시 매달 500~600두의 소가 거래됐으며 1000여명의 장꾼들이 모여들었다.

3월1일 만세운동의 불길은 장기동 황어장터에서도 타올랐다. 음력으로 5일장이 열린 3월24일 오후 2시쯤 600여명의 주민들이 일제에 항거하며 각자 숨겨든 태극기를 꺼내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운동은 당시 31살이었던 심혁성 지사의 주도하에 이뤄졌으며 일본 경찰의 무력진압에 이은선(당시 43세) 지사가 숨을 거뒀다. 이에 항거하던 40여명이 심한 고문과 옥고를 치렀으며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당시 인천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만세운동으로 기록됐다. 현재 황어장터에는 이러한 역사를 되짚어볼 수 있는 기념관과 기념탑이 자리하고 있다.

매년 3월1일이면 만세운동 재현 공연과 기념행사가 진행된다.

/곽안나 기자 lucete237@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