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에 와서 - 박영근

강화에 와서 눈 덮인 벌판을 바라본다
간이역도 없는 마을에
웬일로 텅 빈 기차는 어둑하게 벌판을 달려가고

그때마다 길은 다시 끊기고
나는 지나간 밤 여인숙 방에서 치던
낯선 여자와의 그 서툴던 화투판을 생각한다

나에게 집이 있었던가,
돌아보면 희미한 풍경으로 남아 있던 먼 데 마을
몇 채의 집들

눈벌판이 끝나는 곳에서는 또 갯벌이,
염하마저 얼고 있을 것이다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란 노래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노래 가사의 원작자가 박영근 시인이다. 그는 1958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으나 1985년 인천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시인으로서 치열한 삶을 살다가 2006년 영양실조로 쓰러져 젊은 나이에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그는 1994년 제12회 '신동엽창작상'과 2003년 '백석문학상'을 받기도 했는데, 인천이 낳은 수많은 문인들 중 유난히 술을 사랑했던 시인으로 기억된다.

그는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았고 쓸쓸한 역마의 인생을 탐닉했던 듯하다. '텅 빈 기차'를 타고 '어둑한 벌판'을 달려 허름한 여인숙에 불쑥 들어가 낯선 주모와 하룻밤 화투판을 즐겼던 그에게 따뜻한 집이 있을 리 만무했을 것이다. 쓸쓸함을 반려로 삼아 다니는 자의 종착역이 영양실조란 사실은 그리 생소한 인과관계가 아니다.

도대체 어떤 시대의 아픔이 그를 이토록 허망한 무력(無力)의 절벽으로 밀어붙인 것일까. 요즈음 풍요로움이 넘쳐 음식물이 지천으로 버려지는 시대에, 영양실조라니? 어쩌면 그는 스스로 영양섭취를 거부하고 혼탁한 세상을 훈계하듯 삶을 버린 것은 아닐까? 오늘 아침 조간에 쪽방에서 홀로 생을 마감한 고독사 노인의 기사가 내 맘을 아프게 한다.

어쨌 시인은 떠났고, 세상은 여전히 배부르고 배고픈 양극에 시달리고, 시인이 다녀간 겨울 강화에는 지금쯤 세상을 비웃듯 따뜻한 새봄이 와 있을 것이다. 얼어붙었던 염하강도 풀려 초지대교 아래 밴댕이 놈들이 신나게 뛰어놀 터인데, 이번 주말에는 무릉을 찾듯 강화에나 가서 밴댕이회라도 먹어볼까나?

▲ 권영준 시인

▲권영준 시인은

1998 월간 <현대시> 등단
1999 시집 <박물관을 지나가다> 출간
2002 시집 <불의 폭우가 쏟아진다> 출간
현재 인천 부개고등학교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