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SBS골프채널·MBC-ESPN 골프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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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없고, 채플린 영화를 모두가 봤다고 생각하지만 한 편을 끝까지 본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다. 20세기 최고의 예술가이자 위대한 인물인 찰리 채플린의 골프 관련 작품이 있다. 마치 모두가 본 듯하고 아는 듯 하지만 실상은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중 '골프광 시대'라는 작품이 있다. 원제는 idle class, '유한계급'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적당할 텐데 '골프광(狂) 시대'가 돼버렸다. 번역자들은 채플린의 대표작 중 하나인 '황금광(鑛) 시대'와 연결하려 했던 것 같다. 국내 영화 인터넷 사이트에 '골프광 시대'는 '골프를 칠 수 있는 유한계급을 비웃는 내용'이라는 획일적인 평가가 붙어 있다. 그러나 영화는 유한계급을 조롱하긴 하지만 골퍼를 매도하지는 않는 것 같다. 골퍼를 증오하기엔 채플린의 골프 실력이 너무 좋다.

영화에는 필드에 누워 자고 있는 사람의 입 속에 채플린이 친 공이 우연히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채플린은 그의 배를 밟아 입에서 볼을 튀어 오르게 한 후 공중에서 정확히 쳐냈다. 타이거 우즈가 광고에서 클럽 헤드로 볼을 퉁기다가 때려내는 것처럼 깨끗한 스윙이다. 채플린은 또 특유의 다리를 떠는 동작으로 어드레스하다 날쌔게 한 바퀴 회전한 다음 볼을 때린 다. 회전 후 볼을 맞히는 것만 해도 대단한데 디봇이 거의 생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고 정교하게 쳐낸다.

김연아의 회전과 박인비의 스윙을 합친 것 같다. 영화를 위해 연습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골프 스윙은 단기간에 벼락치기로 연습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발로 공을 차는 '풋웨지(foot wedge)' 기술도 대단하다. 영화에서 공이 없어 골프를 할 수 없었던 떠돌이 주인공 채플린은 다른 사람의 공을 발견하고 몰래 공을 슬금슬금 차서 가져가려 한다. 볼의 주인에게 발각되긴 했지만 시선을 하늘에 두고도 발로 공을 몰고 가는 그의 풋웨지 임팩트는 매우 정확했다.

'골프광 시대'에서 채플린은 골퍼 그 자체가 아니라 비양심적인 골퍼를 조소했다. 또 다른 짧은 필름에서 채플린은 어드레스를 했다 풀었다를 되풀이하면서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니는 캐디에게 클럽을 여러 차례 바꿔달라고 한다. 슬로 플레이하는 골퍼를 풍자하는 것 같다. 그는 물에 들어간 공 등 아무리 나쁜 라이에서도 공을 움직이지 않고 친다. 있는 그대로 친다(play it as it lies)라는 골프의 정신을 지킨다.

영화 속에서 소시민의 대변자였던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노출을 꺼린 듯 하지만 채플린은 진지한 골퍼였다. 매우 폐쇄적인 시카고 골프 클럽 회원들과 채플린이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돌아다닌다.

LA오픈을 여는 할리우드 근처의 명문 리비에라의 클럽 하우스에도 험프리 보가트, 엘리자베스 테일러, 캐서린 헵번 등과 함께 채플린의 사진이 붙어 있다. 심지어 채플린은 할리우드에 있던 자신의 저택에 9홀 짜리 파3 코스를 만들었다는 기사도 남아 있다. 이 코스의 설계자는 오거스타 내셔널을 만든 전설적인 코스 디자이너 알리스터 매캔지였다. 자신의 뒤뜰에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나 오거스타 같은 명 코스를 만들려 시도했다는 얘기다. 채플린이야말로 골프광이었다.

슬랩스틱 코미디와 골프는 어울린다. 희한한 어드레스와 우스꽝스러운 스윙을 하며 감정의 진폭이 크고 작은 내기 돈에 때론 상대를 속이려 하는 평범한 골퍼의 모습을 필름으로 찍는다면 장르는 슬랩스틱 코미디가 될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채플린이 골퍼의 진짜 모습일지도 모른다. 헐렁한 바지와 커다란 구두, 지팡이에 중산모를 쓴 그의 외모가 아니라 오버액션, 허세, 진지하면서도 나약한 그의 개성이 골퍼와 어울린다. 채플린 흉내 내기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명 코미디언이 된 미국의 밥 호프는 골프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1920년대 골프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 골프 대중화에 이바지한 채플린도 골프를 조롱한 사람이 아니라 사랑한 사람으로 재평가 받아야 한다. 골프광이었던 채플린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골프가 더 풍요롭게 될 것 같아서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그가 남긴 명언이다. 그런데 필자는 골프는 멀리서 볼 때 희극일 뿐 가까이 다가서면 온통 비극 투성이란 생각이 자꾸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