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7일(한국시간 12월 8일),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과 필리핀, 말레이 반도를 동시에 기습했다. 독일이 유럽 일대를 석권하며 아시아 식민지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패권이 공백을 빚자, 일본은 그 틈을 타 1941년 7월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다. 이에 맞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들이 대일본 경제제재조치를 취하자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진주만 기습 바로 다음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다음과 같은 대일선전포고문을 발표한다. "吾人은 三千萬 韓國人民과 政府를 代表하여 삼가 中, 英, 美, 加, 濠, 和, 墺, 其他 諸國의 對日宣戰이 일본을 격파케 하고 東亞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됨을 축복하여 玆에 특히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韓國全人民은 현재 이미 反侵略戰線에 참가하였으니 한 개의 전투단위로써 樞軸國에 宣戰한다."

선전포고에 등장하듯 한국의 전 인민은 1919년 3·1만세운동부터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고 있었다. 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렸던 천황의 생일연을 겸한 일본군의 상하이 전승기념행사장에서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것도 그것이었다. 1945년 9월2일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일본 정부를 대표해 참석한 시게마쓰 마모루 외무대신은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당시를 소개하는 뉴스 필름에는 한국 애국자(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시게마쓰가 다리를 잃게 되었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 자리에는 미국을 비롯해 중국, 영국, 소련,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등 참전국 대표들이 모두 참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초대받지 못했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조선의 독립은 허용했지만, 임정을 대한민국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강대국이 인정하지 않았으니 우리도 임시정부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정부가 펴낸 교과서의 입장이다. 국정교과서는 임정을 밀어낸 자리에 대신 재벌과 독재자를 내세웠다. 임정을 부끄러워하는 대한민국은 이제 무엇으로 정통성을 세울 것인가?

/황해문화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