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실 대한결핵협회인천시지부장
6·25 한국전쟁 전 9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가 어린 아들 딸을 책임지는 가장 아닌 가장으로 어렵게 살면서도, 한글을 모르셨던 어머니가 늘 "나는 배우지는 못했지만, 살면서 배울 때를 놓치면 평생 힘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본인이 못 배우고 타고난 팔자이기에 원망하지 않았으며, 자식에게도 내색하지 않고 북새통 배다리 시장에서 노점식으로 소금에서부터 계절에 따라 갖가지 음식을 만들어 팔았다. 월미도입구 대한제분 담벼락 판잣집 단칸 셋집에 올망졸망한 9살, 6살 그리고 갓 돌을 지난 딸까지 두고 혼자 생계를 책임져야 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참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전쟁직후라 누구나 어려운 시절에 살았지만 몸서리치게 가난했던 그때가 내 생활의 눈높이가 됐다. 그래서 지금도 아내나 아이들에게서 제발 피고 살라며, 요즘 세상에 있는 것 제대로 쓰고 살라고 주문 받기도 한다. 하지만 생전에 어머니는 비록 어렵게 살았지만 지나는 배고픈 사람에게 같이 먹자고 불러들인 경우도 많다.

한번은 아침 일찍 나가 저녁에 집에 오셔서 어디 갔다 오셨느냐고 물었을 때 가까운 소새(지금의 부천)에 갔다 오셨다고 했다. 그 먼 길을 갔다 오면서 머리에 이고 손에 과일 등을 들고 오셨다. 물론 지금처럼 욕조시설이 없고 더욱이 편하게 세수조차 할 수 없는 여건에서도 아이들이 잠들면 마지막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잠을 청하셨던 것 같다. 당시 수업료(사친회비)를 제대로 낼 수가 없어 늘 가슴조였다.
가끔 집으로 쫓겨 수업료 가지러 가긴 해도 장사 나가신 어머니는 뵙지 못하고, 다음 날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다.

중2 때부터 동네 지진아 학습지도, 신문 배달 그리고 여러 가지 힘든 일을 거들면서 공부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언제나 큰 아들인 나에게 "너는 집안에 기둥이고, 동생들이 보고 배우도록 잘 살아야 한다. 네가 내 희망이고, 동생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너처럼 어려운 사람에게 보태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주위의 많은 분들이 더 채우려고 하지만 나는 어머님처럼 그저 지나치게 궁색하지 않고 조금씩 덜어내면서 살고 싶다. 조그마한 것은 누구에겐가 보태면서 살아가는 것은 누구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 부족한 듯 덜 가지고도 더 많이 가진 것처럼 살면서 여유롭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점점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어려운 이웃들을 눈여겨보며, 그들에게 삶의 용기를 줄 수 있는 마음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