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29일 인천일보 회의실에서 열린 '대중일보 창간 71주년 좌담회'에 참석한 패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이희환 인천도시공공네트워크 대표,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 김학균 인천예총사무처장, 김송원 인천경실련 사무처장, 유중호 NIB 남인천방송 보도국장. /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 대중일보 창간호 1면
일제강점기의 암흑을 뚫고 광복직후인 1945년 10월 인천에서 비상한 지역신문 '대중일보(大衆日報)'. 창간 71주년을 맞아 대중일보를 인천언론의 '독립신문'으로 세우자는 좌담회가 개최됐다. 인천일보는 지난달 29일 본사 5층 회의실에서 '대중일보 창간 71주년 기념 좌담회'를 열고 각계의 전문가와 함께 이 같은 내용을 논의했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7일 발간된 첫 민간신문이다. 민족의식·독립정신의 상징이기도 하다. 근대 언론의 정신적 지주가 독립신문이라면, 대중일보가 인천언론의 근간을 세웠다는 게 좌담회 참가자들의 주된 견해였다. 참가자들은 항구도시 인천의 지정학적 위치는 공항을 중심으로 미래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를 인천의 지역성을 살리고 홀대를 극복하는 게 지역언론에 주어진 사명이라고 지적했다. 좌담회에는 정진석(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김학균(인천예총 사무처장) 이희환(인천도시공공성네트워크 대표) 김송원(인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처장) 유중호(NIB남인천방송 보도국장)씨가 참석했다. 좌담회 논의를 인물별로 정리했다.

▲정진석 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인천의 언론 역사 부활 노력을"

신문은 서울보다 인천에서 먼저 발행됐다. 독립신문이 발간되기 6년 전 인천경성격주상보가 격주로 발간된 적이 있다. 항구를 끼고 있는 관문이라는 점에서 인천과 신문의 발상지 요코하마는 비슷한 점이 많다.

요코하마에는 신문박물관이 있을 정도다. 일본사람들이 인천에서 발행한 신문의 광고들을 보면 놀랄 수준이다. 아사히 맥주나 일본의 정종, 각종 기계 광고가 등장한다. 수많은 물건들이 인천을 거쳐 서울로 들어갔다는 걸 알 수 있다. 기사를 봐도 그렇다. 독립신문을 발간한 서재필 선생은 인천을 드나들며 활동했고, 인천을 오가는 이승만 박사를 환영인파가 반긴 사진들이 신문에 남아있다. 신문발달에 인천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대중일보는 인천의 독립신문이다. 누군가의 소유라고 말하기보다 정신적인 계승이 필요하다. 인천은 신문이 시작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문화적인 자산과 지역적 연고를 잘 활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은 것으로 다투기보다 정통성은 지면으로 이어받아야 한다.

1973년 1도(道)1사(社) 정책으로 언론통폐합이 이뤄질 때, 나는 기자협회보를 편집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다. 인천에 있는 언론을 수원으로 옮긴 뒤 통폐합한 건 참 잘못된 거다. 인천은 언론 역사에서 대단한 뿌리를 가진 지역인데, 그걸 싹 쓸어서 수원으로 보낸 것 아닌가. 인천지역 언론인들은 과거 역사를 조명하고 새롭게 되살리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김학균 인천예총 사무처장"신문박물관 인천에 만들자"

인천에서 왜 신문이 탄생했겠나. 독립운동가의 길목은 제물포항이었다. 인천은 문화적 욕구가 충만한 곳이었고, 정치일번지였다.

해방공간에 좌우가 모여 진영논리를 펼쳤던 땅이다. 지정학적으로 언로가 트여있던 곳이다. 정치, 경제, 문화적 배경을 보면 필연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문인들이 대중일보에 힘을 보탰다. 시인 임화와 김차영 등이 그렇다. 특히 김차영 선생은 인천의 문학을 일군 분이다.

인천 언론들은 반성해야 한다. 인천과 일본 요코하마는 비슷한 지역인데, 요코하마에 있는 신문박물관이 인천에는 없다.

대중일보가 태어난 자리나 경기매일신문 자리에 박물관을 세워야 한다. 박물관을 통해 언론사를 바로 잡자. 박물관을 시민과 언론사가 대화할 장소로 만들자.

과거 많은 기자들과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다. 대중일보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던 이들이었다. 그게 인천의 자산이다. 신문박물관에서 이를 기리며 언론사를 기록하자.

▲이희환 인천도시공공성네트워크 대표"유신정권 통폐합 재조명하자"

대중일보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안타까운 문제가 있다. 바로 1973년 1도1사 언론통폐합이다.

유신정권의 언론 통제에 따라 한 지역에 한 신문만 남겨두는 폭압이 이뤄졌다. 이 때문에 인천에 자리 잡았으면서 대중일보의 후신이었던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가 수원의 연합신문에 흡수 통합됐다. 신문사가 단절되는 이 시기에 대한 연구가 잘 이뤄지지 않는 것 같다.

당시 언론인들이 어땠나. 강제로 합병되면서 마음대로 말 할 수 없는 사태를 겪지 않았나. 대중일보 창간부터 함께 한 송수안 경기매일신문 사장이 인하공사라 불렸던 중앙정보부 인천분실로 끌려갔다. 폭행당했고 강요에 의해 폐간을 택했던 사정이 있었다. 1973년은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할 역사적 자산이다. 특히 강제통폐합의 단절까지 왜곡하는 건 공공자산에 대한 도전이다.

정 교수님 말씀대로 대중일보는 인천언론의 독립신문이다. 인천 언론사의 중요성을 계속 기념하고 연구하는 건 도시 정체성과 비전에 관계된 문제다.

가치 재창조는 말로 한다고 실현되지 않는다. 문화적, 정신적 기능을 제대로 확보해야 가능하다. 언론은 시정 홍보 수단으로 가고 있진 않은지,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건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언론이 시민 이익을 대변할 때 바로 서게 될 것이다.

▲김송원 인천경실련 사무처장"인천 언론 지방분권 말해야"

대중일보가 창간된 1945년과 2016년의 상황을 돌아보자. 당시 인천은 해방과 동시에 신문이 창간될 정도로 위상이 높은 도시였다. 대중일보의 지면을 봐도 1945년의 인천은 서울 못지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70년이 지난 지금 인천 홀대론이 나오고 있다. 인천 언론은 반성과 함께 과제를 찾아가야 한다.

정부는 투포트 정책을 통해 부산항과 광양항에 중점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반면 인천에는 적기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인천은 정치적으로도 뒤로 밀려있다. 해양경찰의 해체와 해양경비안전본부 세종 이전의 최대 피해자도 인천이었다. 국립해양조사원도 부산으로 이동했다. 영호남 패권 정치로 피해를 보고, 충청권의 균형발전론에서도 소외된 모습이 바로 인천이다. 정치적 중립을 전제하면서 인천의 먹거리와 발전전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국정농단의 핵심은 제왕적 대통령제에 있다. 이에 맞서 지방분권에 대한 요구를 담아야 한다. 인천언론이 지방분권에 앞장서서 새 시대에 맞는 인천의 지역성을 만들자.

▲유중호 NIB 남인천방송 보도국장"인천 언론인들 힘 모아야"

인천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써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대중일보 논란을 보면 이게 인천 언론의 현실이 아닌가하는 참담한 심정이 있다. 대중일보의 정통성은 인천 언론인이 계승해야 한다. 인천 언론이 제대로 서지 못하니 논란이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얼마 전 언론인클럽이 인천언론상을 시상했다. 기관장과 국회의원을 비롯해 현장에 정말 많은 분들이 찾아오셨다. 그런데 주요 언론사들은 잘 안 나온다. 몇몇 신문사만 나와서 축하를 하더라. 지금보다 더 발전시킬 수 있는데, 몇몇 언론들이 이를 외면한 건 아닌가.

신문사의 사세싸움은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철저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한다. 인천일보는 이런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언론인클럽에 참여해서 진정한 언론기관으로 만드는 노력을 보여 달라. 남인천방송도 역할이 있다면 참여할 용의가 있다.

/사회=김진국 기자·정리=박진영 기자 erhist@incheonilbo.com


▲1945년 10월7일 광복 직후 창간...인천 사람들이 힘모아 만든 신문

대중일보는 1945년 10월7일 광복 직후 창간된 지역신문이다. 인천에서, 인천사람들이 힘을 모아 인천 신포동 인근에 자리잡고 역사를 이어간 신문으로 기록되고 있다. "인천의 성장이 곧 국가의 성장이다"라고 밝힌 창간사를 통해 인천을 기반으로 한다는 지역성을 확고히 명시하고 있다.

대중일보는 꾸준히 발행되다 6·25 전쟁으로 잠시 중단된다. 9월 인천과 서울이 수복되자 인천신보로 이름을 바꿔 다시 신문을 낸다. 1957년 기호일보, 1960년 경기매일신문으로 이름을 바꿨고, 지령은 9018호까지 이어졌다.

역사는 1973년 8월31일 단절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권이 1개 지역에 1개 신문만 남겨두는 1도1사 정책을 펴면서다. 인천언론은 1988년 7월 언론자율화와 함께 '인천일보'와 '기호일보'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박진영 기자 erhist@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