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언론, 1988년 7월15일 어둠을 열고 횃불 밝히다
▲ 인천일보가 처음 자리 잡은 구사옥 전경.
▲ 1994년 12월26일 인천일보 신사옥 편집국의 모습. 수북하게 쌓인 자료와 일에 열중하는 기자들이 보인다.
▲ 1973년 시작된 인천 언론의 암흑기는 15년 뒤 막을 내린다. 인천신문(현 인천일보)가 1988년 7월15일 창간호를 내고 '인천의 횃불'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창간 당시 제호의 배경문양은 등대였다. 항도와 사회에 불을 밝힌다는 사명을 나타낸 문양이었다. 인천신문이 창간하고 5일 뒤에는 기호신문(현 기호일보)이 '민(民)의 소리가 곧 신(神)의 소리'라고 천명하며 깃발을 올린다. 사진은 인천신문 창간호. /인천일보DB
▲ 한겨레 1989년 1월5일자 기사 '창간열풍속의 지역언론'. 인천지역 신문의 창간과 의미를 되짚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료=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올해는 인천에서 발행된 대중일보 창간 71주년이다. 1945년 광복 직후 창간된 대중일보는 1950년 6.25전까지 발행된다.
인천신보와 기호일보, 경기매일신문으로 맥을 잇는다. 1973년 언론 강제통폐합으로 인천 신문의 맥이 끊긴다.
1988년 언론자유화로 인천에서 다시 신문이 발행된다. 인천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인천일보와 기호일보가 이 때 탄생한다. 원로 언론인 고 김상봉 선생은 인천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등불, 전깃불은커녕 촛불 하나 없던 암흑의 세계에 등불이 환하게 밝혀졌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라는 말을 남긴다.

인천언론들이 소생한 순간을 만났던 '인천사람'의 증언이었다.

● 인천을 비춘, 인천일보

6·29 선언으로 언론자율화 조치가 시행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지역신문 복간 및 창간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인천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중일보에서 경기매일신문으로 이어지는 인천언론의 맥을 잇기 위한 행동이 이어졌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경인일보 주주로 참여하고 있던 인천지역 주주 15명은 1987년 10월14일 경인일보사 임시 주주총회에서 인천지역에 '인천신문(현 인천일보)'을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창간 준비는 급속도로 이뤄졌다. 주주들은 지분 분할을 통해 중구 항동4가의 경인일보 인천분실 사옥과 컬러 윤전기를 확보한다. 신문 발행에 필요한 물적 요건을 갖췄던 셈이다.

경인일보에서 근무하거나, 과거 경기매일신문에서 일하던 기자들도 대거 옮겨왔다. 경기일보·경인일보에서 편집국장을 지낸 오광철 선생이 주필을 맡았고, 경기매일신문에서 중량급 기자로 활동하다가 언론 통폐합 때문에 직장을 상공회의소로 옮긴 오종원 선생은 편집국장직을 역임한다. 이 뿐만 아니라 김창수, 이재호, 최용표, 정종웅 등 인천에서 오랜 시간 일한 기자들도 합류한다. 창간 당시 조직은 1실5국15개 부서에 인천에 12개 지국, 경기도 25개 지국에 달했다. 지역 언론계는 크게 요동쳤다.

1988년 7월15일. 역사적인 창간호가 발행된다. 20면 특집에 1면 톱기사로 '송도 앞바다 해상 도시'를 배치하고, '창간호 발행에 즈음하여'라는 문병하 초대 사장의 글을 실었다.

2면에는 '인천 발전을 위한 애향의 횃불 - 서해안 시대와 지방화 시대에 때맞추어'라는 제목으로 창간사가 실려 있다. 이 글은 1973년 언론 통폐합을 비판하고, 민주시민 사회의 언론은 다양한 의견의 창구로서의 사명을 지닌다고 밝히고 있다. 또 지방자치제도 시행에 발맞춰 인천지역의 문제와 활동을 중심 과제로 다뤄야 한다고 약속한다. 특히 애향운동의 중심체이자 선도적인 위치에 서겠다는 포부도 덧붙였다.

이 밖에도 3면에서 '풍요로운 국제항구 도시'라는 기사로 2000년대 인천을 그렸고, 4면에서 구정 소식, 5면에서 지방 출신의 시인을 재조명한 '시의 고향'을 실었다.

인천신문은 이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12면 석간으로 발행됐다. 1990년 인천일보로 이름을 바꿨고, 1992년부터 16면을 발행한다. 1995년부터 신사옥(중구 인중로 226)으로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2000년 7월에는 석간을 조간으로 바꾸고 20면씩 발행 중에 있다.

● 또 하나의 축, 기호일보

인천일보뿐만 아니라 기호일보에도 1945년부터 1973년 언론 통폐합까지 고고하게 흐르던 '인천언론'의 피가 흐르고 있다. 서강훈 기호일보 회장은 경기일보 편집부국장 출신이고, 박민규 초대 주필 겸 편집국장은 경기매일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한 바 있다. 이장복 전 경기매일신문 편집국장도 창간 당시에 힘을 보탠 것으로 전해진다.

기호일보의 출발점은 오히려 인천일보보다 앞섰다. 1975년 발간된 교육 전문 주간지 경기교육신보에서 태동했기 때문이다. 경기교육신보는 15년의 인천 언론 공백기에 교육·문화 분야의 갈증을 해소하는 역할을 했다.

기호일보는 1988년 7월20일 '기호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창간한다. 창간사에는 언론 통폐합 정책으로 억눌려있던 언론인의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유신체제가 굳혀지기 이전까지 인천시내에는 3개의 일간신문들이 오순도순 사이좋게 발행되고 있었다. 1도1사 정책이라는 희한한 이름으로 3개의 신문들을 하루아침에 깔아뭉개 버린 이래 인천은 10여 년 동안 벙어리 도시로 탈바꿈 했었다."

기호일보는 1988년 11월 28일 제호를 바꾼 뒤 지금까지 인천 언론의 한 축을 지켜오고 있다.

/박진영·송유진 기자 erhist@incheonilbo.com




"인천은 1973년 이후 15년 만에 신문사를 갖게 된다" 앞다퉈 실어

인천신문과 기호신문의 창간소식을 전하는 서울의 언론들은 지방자치제의 시작과 인천만의 독자적인 신문사가 탄생한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경향신문은 1987년 10월29일자 7면 하단에 '인천신문사 설립 어제 발기인총회'라는 기사를 실었다. 최근 지방화 시대를 맞아 인천을 대변하는 언론의 필요성이 고조됨에 따라 신문을 만들게 됐다고 보도했다. 이와 함께 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주주 12명이 참석한 가운데 총회가 열렸으며 임원진을 선출했다는 내용도 함께 담겨있다.

동아일보는 1988년 2월23일자 2면 '지방신문 창간·복간 움직임 활발'이라는 기사에서 인천신문이 대표이사 선출을 마쳤고, 기호신문은 경기교육신보를 일간지로 바꾸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고 적었다.

인천신문이 창간한 7월15일에도 각 일간지에 창간 기사가 실린다. 동아일보는 '이로써 인천지역은 1973년 언론사 통폐합 이후 15년 만에 신문사를 갖게 된다'고 밝혔다. 한겨레도 '올림포스호텔 대연회장에서 각계 인사와 시민 1000명을 초청해 전야행사를 가졌다'고 적었다.

인천지역에서 신문사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견한 기사도 있었다.

한겨레는 1989년 1월5일 '창간열풍속의 지역언론'이라는 기획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인천신문과 기호신문을 비롯해 인천·경기 지역 신문의 창간 과정 등을 되짚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앞으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지역신문의 위상을 찾아가거나 불가피하게 도태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박진영 기자 erhist@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