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살펴보면 충신(忠臣)도, 간신(奸臣)도 군주(君主)가 활용하기 나름이며, 한때 충신이었으나 나중에 간신이 되기도 하고, 충신들 틈에서는 문제가 없었으나 이들이 사라진 뒤 간신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인천의 옛 이름 중 하나가 인주(仁州)인데, 고려 시대를 기록한 사서에 벌열(閥閱) 또는 해동갑족(海東甲族)이라 하면 곧바로 인주 이씨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인주 이씨 가문이 권력의 정점에서 무너진 것은 예종과 인종의 장인인 동시에 인종의 외조부였던 이자겸(李資謙, ? ~ 1126) 대의 일이다. 예종이 죽자 이자겸은 재빨리 자신의 사위인 14살의 왕해를 인종으로 옹립하고, 도전자들을 제압했다. 이자겸은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려 의전 등급을 왕태자와 동급으로 했으며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人壽節)이라고 불렀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커서 뇌물을 탐했고, 백성의 토지를 거리낌 없이 강탈했으며 물건을 사고 값을 치르지 않았다. 집안의 노비들마저 권세를 누렸다.

이런 이자겸의 전횡을 방치한 것도 모자라 부추긴 것은 사실 인종이었다. 왕이 신하의 이름을 부르는 예를 벗어나 '경'이라 불렀고, 조선국공(朝鮮國公)에 봉했다. 이것이 단지 구중궁궐의 암투에서 그쳤다면 이자겸은 그저 왕의 외척으로 권력을 휘두른 간신에서 그쳤을 테지만, 문제는 고려를 둘러싼 12세기 동북아 국제 정세가 심상치 않았다는 것이다. 고려와 송(宋) 그리고 요(遼)의 안정된 삼각구도가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가 신흥 강자로 떠오르며 붕괴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고려는 동북아의 세력 균형추로서 주체적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간신·외척세력의 발호로 그 기회를 상실하고 만다. 지난 예종 때 윤관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여진족을 정벌한 뒤 이 일대에 동북9성을 설치했지만, 이자겸은 자신의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금나라에게 사대의 예를 바쳤다.

국제정세와 경제상황이 조변석개하는 이처럼 중차대한 시기, 왕조 시대의 구중궁궐을 떠올리게 하는 소식이 끊이지 않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새겨야 할 역사가 아닌가.

/황해문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