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말동무 되어드렸을 뿐인데 … "
▲ 인천시민상 효행상 수상자인 김형석씨가 할머니를 안마해주고 있다.


15일 시민의 날 행사 '효행상'
유치원 때부터 부모님과 이별
빈자리 채워준 할머니께 감사


프로야구선수 꿈 포기… 내 관심사는 오직 취업
든든한 집안의 기둥으로 '진짜 효도' 하는게 꿈


인천시가 시민상을 준 지 38년 만에 역대 최연소 수상자가 탄생했다. 갓 스무살이 된 김형석씨가 그 주인공이다. 올해는 26명 후보 중 10명이 상을 받는다.

15일 문학월드컵주경기장에서 열리는 제52회 인천 시민의 날 기념 '시민 대화합 한마당 행사'에서 시민상을 받는다. 어린 나이에 '효행상'을 받는 김형석씨의 사연이 궁금해 그를 찾았다.

186㎝ 훤칠한 키에 준수한 외모의 김형석씨는 조금은 긴장한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다. 묵묵한 성격의 그는 인터뷰가 시작되자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효도요? 별거 안했어요.평소에 가족과 함께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 그 뿐이죠."

수상 이야기를 꺼내자 김씨는 부끄럽다며 손사레를 쳤다. 김씨는 어린 시절 여러가지 집안 사정으로 인해 부모님이 아닌 할머니 손에 길러졌다.

장난감 사달라며 조를 유치원 때에도, 반찬 투정할 초등학교 시절에도, 사춘기로 방황할 중학교 시절에도, 대입으로 막막한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의 곁을 지켜준건 할머니였다.

그는 보호자 두 명 몫을 혼자 힘으로 해낸 할머니께 감사할 따름이다. 김씨는 그동안 무릎과 어깨가 불편한 할머니의 손과 발이 돼 주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온 그는 할머니의 안마사와 말동무를 자처한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부축해 병원에 함께 가 약도 대신 타오며 보호자 역할도 그의 몫이다. 집 근처 현대시장에 팔짱을 끼고 가장 볼 때는 딸내미 노릇도 톡톡히 해낸다. 또 쉬는 날엔 할머니의 팔을 붙잡고 먼저 나가자며 문을 나서 자유공원과 도원역 등을 한 바퀴씩 돌곤 한다.

식사할 때도 소화하기 쉬운 음식은 할머니를 위해 먼저 권하는 김씨다. 그는 "용돈을 드린다거나 어딜 모시고 간다거나 그런 특별한 효도를 한 건 없다. 지금까지 절 키워주신 할머니께 이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니냐"며 오히려 반문했다.

김씨에게 집안일은 생활이다. 삼촌가족과 살아온 지도 10여년.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기 몫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릴 적부터 해 왔다. 바쁜 삼촌을 대신해 조카의 공부를 봐주고 친구처럼 놀아주는 일도 당연한 생활이었다. 크고 작은 집안일도 당연하다는 듯이 김씨가 먼저 나서 책임지고 있다.

또 가족에게 손을 벌리지 않기 위해 그나마 쉴 수 있는 주말에도 시급이 센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에 보탬이 되고 있다.

그에게도 어두운 구석이 있다. 집안 사정으로 어머니의 손길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엄마 손잡고 지나가는 친구들 보면 솔직히 부러웠다. 엄마 손길이 필요하던 때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했다.

부모를 원망하고 어긋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단 한번도 할머니의 속을 썩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도 사춘기를 피하지 못했던 개구쟁이였지만, 할머니가 삶의 중심을 잡아주곤 했다.

큰 사고나 어린 시절의 방황은 그를 피해갔다. 인터뷰 내내 옆에서 지켜보던 할머니 백영자(76)옹은 "손주가 너무 예쁘고 기특하다"며 흐뭇하게 웃었다.

▲인생의 8할을 차지했던 '야구'

 

 

 

 


그의 꿈은 프로야구 선수였다. 조심스럽게, 소중하게 품어온 미래였다. 친구 부모님은 김씨가 10살 되던 해에 야구를 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하셨다. 글러브를 잡은 소년 김형석에게 야구는 평생의 꿈이었다. 야구부가 있는 창영초등학교, 동산중학교, 동산고등학교를 다닌 탓도 그 때문이다. 수업이 끝나면 글러브와 야구공, 방망이를 집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운동장에서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학년이 오를 수록 현실은 가파른 벽처럼 느껴졌다. 가정형편과 실력 좋은 친구들은 야구선수의 꿈을 접게 했다. '야구선수로 성공해 빨리 돈을 벌 수 있을까' 부터 시작해 '같은 포지션 또래들에 비해 내 실력이 많이 부족하구나'까지. 크고 작은 고민들은 그를 괴롭혔다.

결국 글러브를 벗은 때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였다. 빨리 취업해 가족에게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선수 생활이 그리웠을까. 잠시 김씨의 표정이 어두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전국소년체전에서 첫 홈런을 친 날은 잊을 수가 없다. 너무 좋아 북받쳐 울면서 경기장을 뛰었다." 이것이 그가 야구인생에서 기억하는 가장 강렬한 기억이다.

비록 '프로 야구선수 김형석' 타이틀을 얻진 못했지만 지금은 '코치 김형석'으로 틈틈이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 지난해 겨울, 사회인 야구단 '백상 자이언츠'에 합류해 30·40대 '형님'들의 부족한 부분을 가르쳐주고, 시합이 있을 때는 선수로 뛰며 막내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포지션은 포수와 외야수, 타순은 6번이나 7번이다. 그는 "다들 몇 년 생이냐고 물으시고는 아들뻘이라며 귀여워 하신다"며 "이렇게라도 야구를 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꿈 꿀 나이 20대, 그리고 그가 그리는 미래

야구 말고는 생각해본 것이 없던 김씨는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 끝에 항공정비에 눈을 떴다. 오랜 운동부 생활로 학업에 소홀했기에 걱정이 앞섰지만, 항공 전문 단어부터 차근차근 공부해 나갔다. 그러다 항공직업전문학교에 진학해 뜻을 굳혔다. 공부는 2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그는 "처음엔 항공기 관련 용어가 대부분 영어라 애를 많이 먹었는데, 이제 반에서 중상위권엔 든다"며 "이번 중간고사 목표는 10등 안에 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보고 싶은 곳도, 하고 싶은 것도, 놀고 싶은 것도 많은 스무살이지만 그의 관심사는 오직 '취업'이다. 항공정비사로 입사해 집안의 기둥이 되고 싶다. 하루 빨리 직업을 가지고 손자를 위해 반평생을 희생한 할머니께 진짜 효도를 하는 게 그의 꿈이다. 그는 "우선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며 웃어보였다.

남들보단 '조금 이르게' 철든 김씨가 꿈꾸는 가정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단번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가정"이라고 대답했다. "큰 바람 없다. 그냥 온 가족이 항상 즐거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사뭇 진지했다.

그에게는 다른 어떤 것보다 가족이 모여 일상을 나누는 게 큰 꿈이었다. 또 자식에게 항상 같이 놀아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했다. 형편상 김씨의 아버지는 다른 지역에서 일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가정에 충실하고 기둥 역할을 하는 어엿한 가장이 그가 그리는 미래의 김형석이었다.


/글·사진 송유진 기자 uzi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