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직후 향토지 발간 뜻 모아...당시 문화의식 수준 서울 능가

'인천의 자산' 대중일보는 인천의 지식인과 주요 인사들이 앞장서 창간한 신문이다. 일제강점기 때 신문 지국장을 지낸 송수안(1903~1983)을 비롯해 인쇄인 이종윤(1899~1967), 최초 미술사학자 고유섭의 숙부인 의사 고주철(?~?), 소설가 엄흥섭(1906~?) 등이 힘을 모아 대중일보를 발행했다. <관련기사 2·3면>

엄흥섭이 초대 편집국장을 맡았으며 손계언(정경부장), 이원장(사회부장), 김도인(문화부장) 등이 부장으로 활동했다. 박성원, 송종호, 서봉도 등이 평기자로 현장을 누볐다. 이종윤의 아들인 이벽은 얼마 뒤 기자로 합류했다. 작가인 김도인은 '삼불당(三不堂)'이라는 소설을 연재했다. '인천석금'(인천 근대화 이모저모 소개 책)을 펴낸 고일도 잠시 편집국장으로 일했다.

1946년 12월 주식회사로 전환되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대중일보와 함께 하게 된다. 회장 고주철, 사장 조희순, 전무이사 및 총무국장 최상철, 이사 임홍재·정인락·정규성·이득우·박창규 등이 임원진에 올라 대중일보를 경영한다.

인천언론사는 "광복전후 인천시민들의 문화의식은 서울을 능가하는 수준이었으며 많은 문인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광복직후 좌우 이념대결로 나라가 혼란하자 인천 실업가와 문인들이 중심이 돼 향토지 발간이 급물살을 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천의 원로 언론인 김양수(83)씨는 대중일보 창립자들을 이렇게 기억했다. 기자 생활을 시작한 1951년부터 오며가며 마주친 얼굴들이었다.

"송수안씨는 시청 앞 거리에서 땜장이 조수로 풀무질을 했었지. 능력을 인정받아 과수원집 사위가 되더니만 재산관리까지 맡았고, 피복 사업을 벌이면서 재산을 불렸어. 광복이 오자 양복점만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언론에 뛰어들어 대중일보를 만들었지. 인쇄업자였던 이종윤은 뼈대 있는 집안의 자식이었어. 둘이 만나 대중일보를 만든 거야. 둘의 집도 기억나. 송수안은 애관극장 끝에, 이종윤은 화수동에 집이 있었지."


/이두 기자 two2two2@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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