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옥 어디에 있었나] 첫 위치는 '신포시장 일대' 추정 … 한 달 안돼 '중앙동'으로 옮겨

1945년 11월25일자 社告"8번지 3층 신관으로 이전"
이름 바꾼 경기매일신문, 8-33번지 신사옥서 폐간

인천 신포동에 있었던 대중일보 사옥은 인천 언론의 '요람'이다. 1945년부터 1973년까지 대중일보의 뒤를 이은 인천신보, 기호일보, 경기매일신문은 모두 중앙동 4가에 자리잡고 인천 언론의 자존심을 이어갔다.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상점가가 즐비했고, 인근에 인천시청(현 중구청)이 있었던 중심가였다.

중앙동에 자리잡은 대중일보

대중일보의 역사적인 첫 사옥은 어디인지 확실치 않다. 다만 1945년 10월 대중일보 제2호는 주소를 '궁정(宮町·미야마치) 이(二)'로 밝히고 있다. 여기서 궁정이란 지금으로 따지면 신포시장 일대를 뜻한다.

대중일보를 인쇄한 선영사는 현 인현동 55번지 일대에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중일보에서 선영사와의 거리를 따지면 지금의 신포시장 앞길을 따라갈 때 200~300m 정도로 추정된다.

이 주소는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바뀌었다. 1945년 11월13일자부터는 '본정(本町) 4정목(丁目)'라는 주소를 알렸다.

또 한 달 뒤 1946년 1월 인천시 정명개정위원회는 일본식 주소인 본정 4정목을 '중앙동 4가'로 고친다. 지금의 중앙동 4가와 같은 위치다. 대중일보도 이 때부터 '인천시 중앙동 4가'라는 주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중앙동 4가에서도 어디에 위치했는지는 1945년 11월25일자 "사옥을 8번지의 '전(前) 송옥(松屋)의 3층 신관'으로 이전한다"라는 사고에 나와 있다.

이 주변은 각종 상점이 몰려있던 상점가였다. 송옥오복점(양복점)을 비롯해 금융업을 영위하는 사업체도 여럿 있었다. 더구나 인천항, 상인천역, 인천 외곽으로 나가는 도로가 지나는 길목이라 입지 조건이 좋았다.

원로 언론인 김양수(83) 선생은 당시 풍경을 일부 기억하고 있었다.

김 선생은 "광복 후 개항장 일대에는 먹고 살기 위해 몰려든 사람으로 북적거렸다"며 "6·25가 일어난 뒤에는 대중일보 2층에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가 자리잡았다"고 전했다. 문총구국대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결성한 군 조직이다.

인천 언론의 역사를 잇다

중앙동 4가는 1973년 대중일보의 적자인 경기매일신문이 폐간할 때 까지 인천 언론의 둥지와 다름없었다.

특히 중앙동 4가 8-33번지 건물은 당시 신문의 위상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등기부등본을 확인한 결과, 이 건물은 1959년 8월20일에 등록됐다. 당시의 건물 내역은 '연와조(기와집) 도단즙2계건(함석지붕 2층)'으로 적혀있다.

대중일보 창립자 송수안의 아들 송영호 사장은 1967년 12월30일 이 건물을 구입한다. 이후 경기매일신문은 이 건물을 7층 규모로 증축하고, 1971년 사용승인을 받아 신사옥으로 썼다. 한 층의 면적은 85~89㎡ 정도다.

이 건물은 당시 주변의 어떤 곳과 비교해도 규모면에서 손색이 없었다. 경기매일신문의 사세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초라 할 수 있다. 이 건물도 모자라 건너편에 위치한 벽돌건물을 인쇄 부서인 '동판부'가 따로 썼다고 한다.

1973년 1도1사 통·폐합 이후 중앙동 4가는 기자들의 달음질 소리가 끊어졌다.

경기매일신문이 위세를 떨치던 건물은 지금 개인 소유의 상가로 남아있다. 현재 이 건물 1층은 '수미포차'라는 음식점이다. 바로 인근 사거리 코너에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 인천지점이 있다. 여기에서 300~400m 떨어진 지점에 지금의 인천일보가 우뚝 서 있다.

[왜 인천에서 창간됐나] 신문물 유입 빨랐고 선진 인쇄시설 갖춰져 있었다

대중일보는 광복전 폐간됐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복간보다 먼저 발행됐다.

광복전후 인천 시민들의 문화의식이나 실업가들의 경제력은 서울이나 다른 도시를 능가했다. 지적 수준이 높은 문인들도 인천에서 많이 활동했다.

일제강점기때 신문사에 근무했던 언론인들이 적지 않았고 인쇄시설 등 여건도 갖춰져 있었다. 무엇보다 광복후 상황과 이념 대립을 알리기 위해 신문을 발행하려는 인천인들의 열망이 넘쳐났다.

일제강점기 인천은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화문물을 빨리 받아들였다. 한반도 관문으로 해외에서의 소식이 가장 빨리 도착한 곳이기도 하다. 광복 직후 대중일보가 인천에서 창간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토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일 강제 병합후 일본은 이미 언론의 위력을 알고 있어 인천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관제신문인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를 뿌려가며 강제병합의 정당성을 대대적으로 홍보한다.

인천의 첫 신문은 '인천경성격주상보(仁川京城隔週商報)'다. 일본에 의해 태어났지만 1890년 1월28일에 일찌감치 발간됐다는 점을 보면 다른 지역에 비해 앞섰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조선일일신문', '대한일보', '조선타임즈' 등 다양한 신문이 발행되면서 인천은 신문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인쇄시설은 신문 발행의 핵심이다. '인천경성격주상보'도 인천 중구 중앙동 2가에 위치했던 '인천활자소'가 있었기에 발행될 수 있었다. 인천활자소는 상업의 중심지였던 인천항을 중심으로 많은 이익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대중일보'의 창간은 과거부터 이어진 선진적 인쇄시설이 있었고, 인천의 경제적·문화적 토대가 단단했기에 가능했다.

창간 멤버였던 송수안은 매일신문 인천지사장을 맡아 언론사를 운영한 경험이 있었고, 이종윤은 선영사라는 인쇄소를 운영하던 중이었다.

지역 언론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지역 실업가와 문인들이 보낸 전폭적인 지지도 대중일보 창간의 밑거름이었다.


/박진영 기자 erhist@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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