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귀 깨나 뀌던 이들이 찾던 그 곳, 지금은 노래 깨나 하는 이들로 흥겹구나  
▲ 중앙동 '바다라 노래타운' 건물은 100여년 전 '고전양품점'이란 이름으로 서양식 잡화를 팔던 곳이다. 한 세기를 건너오는 동안 용도와 색깔은 변했지만 건축물 형태는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 2009년 풍경
▲ 1991년 풍경
▲ 1910년 풍경

인천 대표 중심지 '신포동' … 유서 깊은 가게들 명성 자자
길모퉁이 뾰족한 지붕 2층 양옥집, 1층 노래방 2층은 음악카페 자리잡았네
25년 전 유흥주점, 100년 전엔 서양 물품 팔던 '고전양품점'이었다지


유흥주점이 들어선 저 건물이 100년 전엔 양품점이었다고? 개항기, 저 박물관엔 14개국 사람들이 북적였다던데….

인천일보가 창간 28주년을 맞아 '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을 연재합니다. '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은 인천 중구의 근대건축물을 중심으로 지난 100년 동안 인천이 변해온 모습을 생생한 사진과 기록으로 만나는 기획입니다.

100년이라면 강산이 열 번은 변한 기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세기 전, 50여년 전, 또 20여년 전 인천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그 얼굴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가. 인천일보 독자들께선 '인천일보 창간 28주년 특별기획'을 통해 한세기를 관통하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간여행을 떠나실 겁니다.

때때로 한 세기 전 풍경과 지금의 달라진 모습을 보며 격세지감도 느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땅 인천을 더욱 사랑하게 되실 겁니다. 이 여행엔 오랫동안 인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온 유재형 사진가가 동행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신포동'이란 이름으로 널리 불리는 인천 중구 중앙동, 신생동, 관동, 해안동 일대는 인천의 정체성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동네이자 인천의 대표적 중심가다. 지금은 부평과 구월동으로 인천의 중심지가 일부 분산됐다고 하지만 그래도 '인천의 중심' 하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신포동'을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곤 한다.

최근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낙후된 도심 지역에 문화 예술인들이 들어와 새로운 공간을 창출, 상권이 활성화되자 땅값과 임대료가 상승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내몰리는 현상)이 나타날 정도다. 실제 신포 로데오 거리 입구-중구청-개항장 거리-차이나타운의 건물가격은 2~3년 전에 비해 약 1.5배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포동엔 여전히 유서 깊은 식당들이 즐비하며 다복집, 대전집, 염염집 등 전통의 '대포집'들이 신포동의 옛 명성을 잇고 있다.

홍예문 길을 따라 신포동 방향으로 언덕을 따라 내려오면 작은 사거리를 만난다. 그 사거리에 서서 왼편 대각선 방향을 바라보면 뾰족한 지붕을 한 벽돌색의 2층 양옥집이 눈에 들어온다. '바다라 노래타운'이란 네온사인 간판을 걸고 있는 건물이다. 건물 한 켠으로 '명진일식'이, 다른 한 켠으로 '전주콩나물국밥' 식당이 붙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91년만 해도 이 건물 외벽엔 '한마당'이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역시 노래하는 유흥주점이었다. 당시 한마당은 지금의 건물형태와는 똑같지만 외벽은 붉은 색이 아닌 회색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건물 2층은 재즈음악 전문카페인 '버텀라인'이다.

인천의 대표적 음악카페이면서 재즈음악 전문 카페인 버텀라인은 33년 전부터 이 건물 2층에서 재즈의 향기를 피워내고 있다. 3층이라고까지는 말 할 수 없는 2층 위엔 작은 다락방이 하나 있다.

다락방은 버텀라인이 창고처럼 쓰고 있는 공간이다. 버텀라인과 함께 '흐르는 물', '탄트라' 등 신포동에 현재 9개 정도의 음악카페들이 빛깔이 다른 여러 음악을 들려주고, 때때로 하우스콘서트를 개최하며 인천의 문화를 한층 풍요롭게 일구고 있다.

이 건물이 100년 전 최신 물품을 파는 '고전양품점'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00년대 초 만해도 이 건물에 '古典洋品店'이란 간판이 가로, 세로 2개 붙어 있었다. 양품점은 서양에서 들여온 일용 잡화를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다. 많은 선남선녀들이 이 2층 양옥집 앞을 기웃거렸다.

아녀자들은 바르기만 하면 선녀처럼 얼굴이 하얘지는 분가루를 사고 싶어서, 남자들은 카라가 빳빳한 하얀 셔츠에 양복을 입고 싶어서 고전양품점 앞에 발걸음을 멈춘 채 침을 꿀꺽꿀꺽 삼키곤 했다. 챙이 넓은 신사모자와 앙증맞은 양산도 탐나는 물건이었다. 그렇지만 고전양품점의 주 고객은 일본인들이었고, 일부만이 '방귀 깨나 뀌는' 인천사람들이었다.

개항 이후 썰물처럼 밀려 들어온 일본인들이 떡 허니 신포동을 차지한 채 자기 나라처럼 행세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정작 신포동의 주인이었던 인천사람들은 홍예문 뒤쪽으로 밀려 밀려 지금의 '동구' 밖으로 내쫓길 수밖에 없었다. 이때문에 인천의 원도심 주민은 사실 중구가 아니라 동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1920년대 중구 내동에 '대동상회'(大東商會)라는 새로운 양품점이 생기기 전까지 '고전양품점'은 인천의 소비시장을 독점했다고 전해진다.

고전양품점 맞은 편에선 지금 중국음식점 '중화루'와 '진흥각'이 수십년 째 고객들을 맞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차이나타운의 중국음식점으로 발걸음을 하지만 음식 맛을 좀 아는 사람들은 중화루나 진흥각의 맛을 잊지 못 한다.

차이나타운의 중국음식점들이 현재 '가화만사성'이란 공중파 드라마의 로케이션장소가 될 만큼 유명해지기도 했다. 신포동의 '작은 백화점'이었던 고전양품점은 한 세기를 건너오면서 유흥주점으로 변했고, 그렇게 흥겨운 모습으로 인천시민들을 만나는 중이다.


/글 김진국 기자·사진 유재형 사진가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