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 논설실장
4348년전,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한 사람이 하늘에 제를 올렸다.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단군' 이었다. '하늘의 아버지시여, 우리나라 자손만대로 번창하도록 돌봐 주소서.'
하늘에서 내려온 천제의 아들인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태어난 우리민족의 시조 단군왕검은 그렇게 기원했을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고조선은 중국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이르는 영토를 가진 강력한 국가였다. 단군은 어째서 다른 곳이 아닌 '강화도'에 '참성단'을 세웠을까.

780여년 전인 1232년, 왕건이 세운 고려왕조는 수도를 개경(개성)에서 강도(강화도)로 옮긴다. 대몽항쟁을 위한 최후의 결단이었다. 개경으로 환도한 1270년까지 고려는 몽골에 맞서 싸우는 한편, <상정예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와 같은 세계 최초·최고 금속활자본을 빚어낸다. 이 기간 '팔만대장경'을 판각하기도 했다.
1678년(숙종 4), 강화도 전등사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건립된다. '정족사고'는 전국 4대사고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사고로, '전등사'는 왕조실록을 지키는 사찰로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된다.
1781년 '세종대왕'과 더불어 조선조 왕 가운데 '대왕'의 칭호가 붙는 '정조대왕'은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세워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한다. 정조대왕은 당시 수원에 화성이란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를 조성해 왕위를 물려준 뒤 화성에서 기거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화성에 집중했어야 했는데 굳이 왕실의 중요한 서적을 강화도에 보관한 것이다.

강화도는 임진강, 예성강, 한강이 만나는 지점이어서 어류가 풍성하기도 하다. 강화새우젓의 생산량이 전국의 70%를 차지하고 그 맛이 전국 최고인 이유는 천혜의 어장이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교동평야를 중심으로 생산한 강화섬쌀의 경우 한 해 생산량으로 강화군민 전체가 10년~20년을 먹고 살 수 있는 곡창지대이기도 하다.

강화도 마니산의 기운은 매우 강하며, '순무'는 강화도땅에서만 나오는 특산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종합할 때 강화도는 '민족의 성지', '민족의 기원지'이자 '젓과 꿀이 흐르는 섬'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시쳇말로 '강화 사람은 발가벗고 100리를 간다'는 말이 있다. '넉살 좋은 강화년'이란 얘기도 있다. 이 말은 강화사람들이 대단히 단단하다는 얘기다. 경제적으로는 생활력이 강하고, 정치적으로는 애향심이 남다른 사람들이 강화 사람들이다.
강화는 한때 우리나라 직물산업의 중심지였으며, 개성에서 가져온 인삼을 강화인삼이란 브랜드로 바꾸어 버린 곳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엔 외성·내성·중성을 쌓아 몽골과 맞서 싸웠으며 '신미양요'와 '병인양요'를 온몸으로 막아냈다. 이처럼 강화사람들은 역사의 중심으로 시작해, 역사의 한 가운데를 흐르며 강화는 점점더 강해져올 수밖에 없었다. 강화도 군수가 되려면 반드시 강화도에서 태어나야 가능하다는 것에서도 우린 강화도 사람들의 정서를 읽을 수 있다..
사람과 함께 강화도엔 유적과 유물로 넘쳐난다. '파기만 하면 나올' 정도로 아직 발굴하지 못한 유적지도 많다. 얼마전 '청주고인쇄박물관'을 찾았을 때 그곳 연구자는 "강화도는 '뚜껑 없는 박물관'이라 얼마나 좋으냐, 인천은 강화도 때문에 먹고 살 수도 있지 않느냐"는 말을 들었다.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얘기였지만 다른 지역의 역사연구자로부터 듣고 나니 그 말이 새롭게 다가왔다. 인천이 올해 강화고려역사재단을 중심으로 '강화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한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며, 이 기회를 통해 강화도가 '고려의 고도(古都)'임을 재확인하고 숨은 보물을 훨씬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